부산 기장군 철마면 '아홉산 숲'
문씨일가 400년 간 가꾸고 지켜온 비밀의 숲
임진왜란 피해 옮겨와, 지금에 이르러
일제강점기 놋그릇 내주며 숲 지켜
영화 '군도' 등 명장면 만들어
개방 후 훼손에...방문객 제한도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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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어두컴컴하다. 대나무 숲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바람이 분다. 저마다 이야기를 주고받듯 댓잎이 바스락거린다. 울창한 대숲을 할퀴며 부는 바람도 깨끗하다.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대숲을 자분자분 걷기만 해도 가슴 저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시름이 삽시간에 씻겨 내리는 듯하다. 부산 기장군 철마면 미동마을에 자리한 아홉산 숲. 문씨 일가가 400여 년에 걸쳐 길러낸 숲이다. 여기에는 분수도, 인공적인 꽃길도 없다. 다만 나무를 스쳐 가는 바람, 풀과 나무의 향기, 새들의 소리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긴 세월 문씨 일가의 고된 노동의 흔적이 있다. 시간이 정성으로 쌓여 숲이 되었다. 대숲에는 봄바람이 가득하다. 바람 불어올 때마다 조심조심 소리 낸다. 되도록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푹신한 흙을 밟고, 촉촉하게 습기 머금은 대숲을 거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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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의 세월이 기른 ‘아홉산 숲’
부산의 청정지역 기장군 철마면. 그곳에는 4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명품숲이 있다. 철마면에서 정관읍으로 향하는 옛 도로변(웅천리 480번지)에 야트막하게 위치한 아홉산 자락 아래 남평 문씨 일가가 무려 9대에 걸쳐 지켜온, 그리고 지키고 있는 ‘아홉산 숲’이다. 금강송, 참나무, 편백, 대나무가 뒤덮고 있는 이 숲의 규모는 자그마치 52만㎡(15만7000여 평). 숲에는 아름드리 거목들이 울창하다.
잠시 숲이 가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이 숲의 시작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에서 살던 남평문씨 일가는 난리를 피해 철마면 웅천 미동마을로 옮겨와 숲을 가꾸기 시작했다. 일가는 이곳에 대숲과 금강송·편백숲·편백·참나무 등을 심었다. 지금껏 3~4차례 큰 위기도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일제가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집안의 쇠젓가락까지 공출해 가고, 그도 떨어지자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일본 순사들은 아홉산 숲 뒷산의 나무를 베기 위해 들이닥쳤다. 이때 일가 어른이 일종의 ‘쇼’를 했다. 일부러 놋그릇을 숨기다 들킨 것이었다. 놋그릇을 뺏긴 어른은 조상들 제사를 어떻게 모시느냐며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했고, 순사들은 놋그릇만 갖고 슬며시 도망치듯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문씨 일가는 아홉산 숲을 목숨처럼 가꾸고, 관리했다. 최근에도 큰 위기가 있었다. 숲을 관통하는 임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기장군은 ‘테마가 있는 임도’를 내걸고 홍보를 시작했고, 행락객들이 몰려들었다. 반세기의 고요를 간직한 아홉산 숲은 고기 굽는 냄새와 행락객들의 음주·가무로 몸살을 앓았다. 심지어 트럭을 몰고 와 대나무를 베어가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야생난은 자취를 감췄고, 희귀식물은 뿌리째 뽑혀 갔다. 결국, 문씨 일가는 아홉산 숲에 철조망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2년여에 걸쳐 숲 주위에 둘레 2.5km의 철조망을 세웠다. 비용만 1억 5천만 원이 들었다. 숲은 조금씩 살아났다. 문씨 일가는 2003년 3월 숲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학술적 목적만 민간의 입장을 허락했다. 같은 해 9월 지난해 9월 아홉산 숲의 올바른 활용을 위한 ‘아홉산 숲사랑 시민모임 추진위원회’를 만들었고, 10여 년이 지난 2015년 3월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생태치유 프로그램을 본격 운영한 것도 이때였다. 일반에 공개한 지 3년. 다시 아홉산 숲은 고민에 빠졌다. 관람객이 늘면서 숲이 훼손되고 있어서다. 문씨 일가는 다시 관람객을 제한하는 방법을 생각 중이다. 그보다 관람객 스스로가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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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빽하게 늘어선 대숲을 걷다
탐방로의 시작은 아홉산 숲 매표소부터다. 매표소 앞 계단을 오르면 구갑죽(龜甲竹)마당와 관미헌(觀薇軒)이다. 구갑죽은 나무껍질 문양이 거북 등처럼 생긴 대나무를 일컫는다. 1950년대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들여온 뿌리를 이식한 것이 작은 정원을 이룰 만큼 번졌다. 1990년대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전만 해도 국내에서 유일하게 아홉산 숲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대나무였다. 구갑죽은 맹종죽과는 아주 다르다. 맹종죽이 길고 날씬하다면, 구갑죽은 짧고 굵다. 맹종죽은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한다면, 구갑죽은 무릎을 굽혀 낮은 자세로 봐야 한다. 스스로 겸손해지는 법을 깨우치게 하는 나무다. 구갑죽 정원 뒤편이 문씨 일가 종택 관미헌이다. ‘고사리조차 귀하게 여긴다’라는 뜻으로, 문씨 일가의 자연철학을 담았다. 60여 년 전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순전히 아홉산의 나무로만 지은 한옥이다. 지금도 산주 일가와 직원들의 생활공간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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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미헌을 나와 본격 숲 탐방에 나선다. 관미헌 왼편 오솔길을 따라 조금만 발길을 옮기면 엄청난 규모의 대숲이 펼쳐진다.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굵은 맹종죽 숲, ‘굿터’다. 100여 년 전 중국에서 들여온 맹종죽을 처음 심은 곳이다. 오랜 세월 마을 굿터의 역할을 했다고 해 지금도 굿터로 불리고 있다. 이곳에서 영화 ‘군도’, ‘협녀, 칼의 기억’, ‘대호’의 명장면이 여기서 탄생했다.
굿터를 나오면 아홉산 숲의 또 다른 자랑인 ‘금강소나무 숲’이다. 수령 약 400년의 금강송 군락이다. 아홉산 숲에는 무려 116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금강소나무 숲에서 조금 더 오르면 바람의 길이다. 깻잎 나무와 맹종죽이 양쪽으로 마주 보고 있다. 아홉산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다. 두 손으로 움켜쥐기 벅찰 정도로 굵은 대나무가 끝없이 이어진다. 연둣빛부터 시퍼런 초록빛까지 제각각의 색을 띤 대나무가 마치 하늘을 막으려는 듯 빼곡히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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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길 끝에 영화 대화 촬영 때 지은 서낭당이 있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은 편백숲으로, 오른쪽 길은 평지대밭으로 이어진다. 평지대밭으로 향한다. 짙은 진달래 군락지를 지나면 길을 지나면 다시 울창한 맹종죽 숲인 평지대밭이다. 약 1만 평 규모다. 아홉산 숲에서 가장 큰 맹종죽 숲이다. 1960~70년대 부산 동래지역 식당에서 남은 밥을 걷고 분뇨차를 불러 거름을 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2016년 방영한 ‘달의 연인 보보경심’을 촬영한 곳이다. 바닥에서 솟구친 초록이 하늘까지 뒤덮어 볕이 들지 않는다. 빼곡히 들어선 대나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코와 잎, 그리고 허파까지 모든 게 자동문처럼 열린다. 형언할 수 없는 신선한 공기와 대나무향이 온몸에 배도록 날갯짓을 할 정도다. 평지대숲을 한 바퀴 돌면 길은 다시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약 1시간 30분 정도의 숲속 산책이 짧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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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가는 길= 부산 시내에서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타고 가다 기장 철마나들목에서 나와 곰내길을 따라가면 아홉산 숲이다. 대중교통으로는 부산지하철 1호선 노포역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2~3번 기장군 마을버스를 타고 미동마을에서 하차하면 된다.
△잠잘 곳= 부산에서 숙소 선택권이 가장 넓은 곳은 해운대다. 해운대에서 가장 입지 조건이 좋은 곳이라면 단연 파라다이스 부산이다. 해운대해수욕장 최적의 자리에 호텔이 들어서 있어 객실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먹을 곳= 기장 철마를 대표하는 음식은 ‘철마한우’다. 한우가 부담스럽다면 부산 동구 초량동 ‘원조불백’도 좋은 선택이다. 1986년 고(故) 권소선 씨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불고기백반을 볶아 만들어 오던 곳으로, 지금은 권 할머니의 손녀딸인 오재영 씨가 전통방식 그대로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해운대구 좌동 재래시장 인근에 자리한 ‘달해’는 최근 부산 미식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이곳에서 꼭 맛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10년산 자연산 바위굴이다. 담백함은 물론, 입안 가득 풍미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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