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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봄나들이 강화도 나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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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라면 왠지 그래야 할 거 같다. 그저 마냥 멀어 지금 내가 있는 이곳과는 어떤 연(緣)도 닿지 않아야 할 그런 망연(茫然)함과 고립감의 공간. 하지만 강화도는 섬이되, 그런 섬은 아니다.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망연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섬은 망연자실한 역사를 겪기도 해야 했다. 한양과 개경이라는 오래된 고도(古都) 사이에 있었기에 참 많은 지난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이곳. 어느 봄날, 그 섬길을 거닐며 쌓여진 시간의 퇴적층들을 한 겹씩 만나는 길이기도 했다.

강화가 강화(江華)라는 명칭으로 처음 불리게 된 것은 고려가 세워진 후인 940년 즈음이다. 이전에는 혈구군(穴口郡) 해구군(海口郡) 등으로 불리다가 이 때에 처음 강화현(江華縣)으로 편제되었다. 강화는 강과 관련된 지명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의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고 하여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江華)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는 꽤나 고단한 섬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기도 했고,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를 원하던 신라 역시 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삼국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였으니 이곳을 둘러싼 격전은 언제나 치열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왕이 천도를 감행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정묘호란을 겪으며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섬 전체가 함락되기도 했다. 효종은 북벌을 추진하면서 이곳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했고, 이후 숙종 때까지 추진되어 12진·보와 53돈대, 9포대가 축조·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이 군사기지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의 침입을 막는 최전방 해안 기지가 된다.

단군왕검의 신화가 서린 마니산과 첨성단, 우리 국사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그 이름을 올린 지역답게, 그 고단한 역사의 흔적들이 지금에 와서는 강화를 한층 더 매력적인 탐방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고인돌 유적지를 비롯해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삼랑산성과 전등사, 고려궁지, 각종 돈대와 보 등 그 역사 속 공간들이 오롯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의 도보 여행길인 나들길은 총 20개의 코스로 총 310.5km에 달한다. 코스의 길이는 10~18km 정도이며 3시간 반에서 최대 6시간 정도면 한 코스를 마감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각각의 코스마다 해안길, 사찰, 돈대, 궁터, 석묘, 마니산, 갯벌 등 다양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 그중 초지진에서부터 강화읍내까지 이어지는 제2코스와 제1코스를 다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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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코스 호국돈대길

▷거리 17km / 소요시간 5시간50분

강화도는 예로부터 서해안 경비의 중심지로 해안 경계부대인 12진보가 있었다. 한양과 개경이라는 두 큰 도시 사이에 있는 큰 섬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鎭)들이 강화도와 그 근처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초지대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초지진에서부터 해안을 따라 강화대교에 직전의 갑곶돈대에 이르기까지 쭈욱 늘어서 있는 덕진진, 용두돈대, 광성보, 오두돈대, 화도돈대, 용당돈대, 용진진 등의 진(鎭)과 돈대(墩臺)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등 외세에 대항한 근대사의 흔적들을 둘러볼 수 있는 공간들이다. 그중에서도 덕진진과 광성보의 규모가 가장 크다.

초지진(草芝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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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草芝鎭) | 작은 원형 외벽과 그 한 가운데에 있는 포대가 자리잡고 있는 초지진. 규모는 작지만 주변의 소나무 한 그루에까지 새겨진 역사의 흔적은 깊다.

1656년(효종 7년)에 구축한 요새로, 1866년(고종 3년)의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군과 1871년 (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이다. 1875년(고종 12)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돼 있고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초지진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주차장에 관광안내소가 있기 때문에 강화초지대교를 지나서 초지진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한다면 꼭 들러 지도를 챙겨둘 것.

Info 관람시간 09:00∼18:00 *연중 무휴 입장료 청소년 500원, 어른 700원

덕진진(德津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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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진(德津鎭) | 12진보 중에서도 요충지답게 문루에서부터 웅장함이 느껴진다. 해변을 따라 길이 늘어져 있어 산책을 하기에도 좋다.

초지진에서 약 2.8km 북쪽에 위치한 진이다. 단순히 포대만 있는 초지진과 달리 경내가 넓은 편이라 문루와 돈대 사이로 해변을 따라 숲길의 정취마저 느낄 수 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야음을 틈타 이곳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48시간에 거쳐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이 안에 있는 덕진돈대와 남장포대가 있는데 북쪽의 광성보와 남쪽의 초지진 중간에 위치하여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지였다고 한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다. 이 때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돈대와 포대 외에도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대원군이 세운 경고비(警告碑)가 있다. 경고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져 있는데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흥선대원군다운 경고비이다.

Info 관람시간 09:00∼18:00 *연중 무휴 입장료 청소년 500원, 어른 700원

광성보(廣城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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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廣城堡) |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광성보. 그 치열한 만큼이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과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을 기리는 의총이 있다.

덕진진에서 3.5km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광성보에 들어서기 위한 문루는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만든 것인데 안해루(按海樓)라고 부른다. ‘바다를 순찰하는’ 망루라니, 그 이름부터 꼭 들어맞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 3개의 돈대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신미양요 당시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등이 있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분전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손돌목돈대의 이름의 유래가 된 ‘손돌목’은 예로부터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아 조운선이 수시로 난파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시대의 한 왕이 피난을 위해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모는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위태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참수하라 명하였다. 손돌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왕을 걱정하여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돌의 말대로 하여 이곳을 무사히 지난 왕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넋을 위로하며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라 하더라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터이니, 그만큼 잦은 외세의 침략과 싸우면서, 또 때로는 지배 계층의 피난처로 사용되며 알게 모르게 겪어야 했던 강화도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이야기이다.

Info 관람시간 09:00∼18:00 *연중 무휴 입장료 청소년 700원, 어른 1100원

제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

▷거리 17.8km / 소요시간 6시간

심도역사 문화길은 갑곶돈대에서 옥계방죽을 따라 해변길을 걸으며 바다를 면한 정자인 연미정과 월곶돈대를 거쳐 고려시대의 임시수도로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강화산성,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공회한옥성당 등이 모여 있는 강화읍내에까지 이르는 코스이다. 2코스를 따라오며 돈대와 해변길을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된다면, 읍내에 있는 사적지들만 둘러보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특히 강화버스터미널이 이곳에 있어서 대중교통으로 강화도를 방문하는 이라면 이곳들만 둘러보아도 꽤 만족스러운 당일치기 여행이 될 것이다.

고려궁지(高麗宮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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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高麗宮址) | 고려 시대에 외란을 피해 천도를 해온 궁궐터였으나 지금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이방청 등 조선시대 유적만 남아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 있던 곳으로,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 동안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할 때(1270년)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이 행차 시 머무는 행궁을 짓고,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도 건립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강화산성(江華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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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산성(江華山城) |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지은 산성. 지금은 그 성곽들이 고즈넉한 산길에 정취를 드리워주고 있다.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이것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강화산성이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동문인 망한루가 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복원 정비되어 있다. 산성을 따라 오르는 산길이 고즈넉한 매력이 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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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강화성당 (大韓聖公會 江華聖堂) |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에 의해 1900년에 지어진 성당. 서유럽의 바실리카 양식과 한국 사찰의 목조 양식이 함께 어우러졌다.

강화도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문화유산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서양 건축 양식을 한국적으로 되살려 낸 모습이 건축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조차 무척 이색적이다. 1900년 11월15일 건립한 이 성당은 바실리카(basilica)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전체적으로 배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구조와 외관에 한국전통 건축양식을 적용하여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였다.

용흥궁(龍興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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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龍興宮) |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집.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다.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였던 곳이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소박하다. 궁 안에는 철종의 잠저(潛邸: 종실에서 들어와 된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이르는 말)임을 알리는 비석과 비각이 있으며, 내전·외전·별전이 각 1동씩 남아 있다.

강화도 나들길 여행 Tip

☞ 배가 출출하다면, 왕좌정 묵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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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밥, 묵전, 묵무침 등 묵 전문 요리집으로 고려궁지 근처에 있다. 가격이 적당하고, 맛도 씀씀하여 걷느라 지친 다리를 쉬며 한 끼를 채우기에 족하다.

주소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55

가격 묵밥/묵전 7000원, 묵무침 1만원, 콩비지 7000원.

[글 박정선 사진 한용]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25호 (18.04.24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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