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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쪼개진 슈퍼영웅들’이 한반도에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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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한겨레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팀 아이언맨과 팀 캡틴은 정부의 입장에 대한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마블 슈퍼영웅 사이의 시빌워(civil war·내전)라고 부를 수 있다.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절대 나쁜 놈’과의 싸움이 아닌
슈퍼히어로들 간의 내전 다뤄
‘인류·지구 구한다’는 대의명분
앞세웠던 영웅들에게 경종 울려


‘절대 나쁜 놈’ 대 ‘절대 우리 편’
20세기식 이분법에서 벗어나
‘민주적 통찰’ 얻은 한반도
먼 길 돌아 목적지 앞에 섰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할리우드 대박지향적 영화의 흥망은 나쁜 놈(또는 악의 축)에 의해 결정되어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 광휘가 21세기 현재까지도 면면히 뻗쳐오고 있는 20세기 <스타워즈>만 보더라도 이는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맞다. 다스베이더 얘기다.

이제 우리는 안다. 세상 그 어떤 춘장보다도 검고 진하였던 다스베이더 망토와 마스크의 흑색이 아니었더라면 루크 스카이워커-레아 공주-한 솔로로 이어지는 우리 편(또는 착한 편)의 풋풋하고도 싱그러운 생기가 그렇게까지 선명한 채도를 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어디 이런가. 그 불세출의 나쁜 놈 다스베이더가 온 곳은.

아시다시피 <스타워즈>의 ‘제국’은 이른바 ‘제3제국’을 선포하면서 발흥한 나치를 핵심원료로 삼고 있다. 그렇다. 나치는 2차 대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역사 내내 각급 나쁜 놈을 안정적으로 제공해온 1급 수원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데 20세기의 중반부터 후반까지, 모든 면에서 나치에 필적할 만큼 풍요로운 나쁜 놈 수원지가 하나 더 존재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 냉전 체제하에서의 소련(및 사회주의권, 이하 ‘소련’) 얘기다.

전성기의 소련은 한때 나치, 마약과 더불어 할리우드의 3대 나쁜 놈 공급처였다. 하지만 유독 소련형 나쁜 놈만은 ‘빨간 별 완장 찬 늑대’, 즉 ‘원래 그냥 나쁜 놈’ 수준을 넘지 않는 무성의한 묘사(그 대표적인 예로 <람보> 시리즈)의 희생양이 되었고, 이는 결국 소련(및 사회주의권)의 나쁜 놈 선수생명을 급격히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신냉전시대’라 불리는 최근의 국제정세는 할리우드로 하여금 소련에 새삼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할리우드는 마치 장기간 발효 숙성시킨 뱀술을 내오듯, 우중충하고 음습한 이미지에 담가진 채 잠자고 있던 소련(및 사회주의권)형 나쁜 놈을 다시 꺼내, 나치와 접붙이기를 함으로써 새로운 하이브리드 나쁜 놈을 탄생시켰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히드라’라는 나쁜 놈 비밀결사 얘기다.

조직원들이 종종 외치는 “하일 히드라!”라는 구호가 ‘혹시 히틀러의 일본식 발음?’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정통 나치계 나쁜 놈 조직 ‘히드라’는, 구사회주의권을 상징하는 빨간 별, 시베리아 비밀 미사일기지스러운 분위기의 세트 등을 통해 소련(및 사회주의권) 또한 겹쳐 떠올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 ‘히드라’ 덕분에, 이들을 주요 악의 축으로 설정하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는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 하나를 마주칠 수밖에 없게 된다. 공산당보다 월스트리트가 더 무섭고 사악할 수도 있음을 아는 지금 21세기의 관객들에게, 냉전시대에조차도 다분히 초등학적으로 보였던 ‘뿔 달린 빨간 늑대’ 식의 나쁜 놈 설정을 과연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시빌 워>가 훌륭했던 점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를 주축으로 한 어벤져스팀이 나이지리아에서 벌인 전투로 시작된다. 그런데 염력녀인 ‘완다’는 캡틴 아메리카를 구하기 위해 자살폭탄맨을 하늘 높이 날려버리고, 이 폭탄이 그만 민간인 빌딩의 옆구리에서 폭발, 서너층가량이 순식간에 초토화되고 만다. 동시다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토니 스타크(아이언맨) 앞에도 ‘소코비아’에 봉사활동을 갔다가 ‘소코비아 전투’로 인해 애꿎게 희생당한 미국 청년의 엄마가 찾아와 눈물과 원망을 뿌린다.

물론 이 사건들은 그 자체론 충분히 비극적이다. 하지만 어벤져스의 민폐에 제동을 걸며 이들을 유엔에 복속시킴으로써 ‘이제부터 우리 허락받고 싸워’라고 말하는 영화 속 미 국무장관의 지적대로, 어벤져스들이 이전에 벌였던 전투들(즉 맨해튼의 고층빌딩 십수채가 반파 또는 전파되었던 <어벤져스> 1편의 ‘뉴욕 전투’나, 도시 하나가 통째로 지표에서 뜯어져 공중부양했다가 결국 분말형으로 분쇄되었던 2편의 ‘소코비아 전투’ 등)에서의 민간인 피해 규모를 생각한다면, 빌딩 폭발 정도는 그야말로 타조알 앞의 메추리알(아니 날치알)에 불과했다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민간인 피해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는 듯 새삼 이를 심각하게 취급하기 시작하는 영화의 개과천선은 아닌 게 아니라 다분히 코믹한 것이긴 했다만, 뭐, 이제라도 그 부분에 주목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고 계속하자면.

이러한 상황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절친 버키(윈터솔저)는 속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쁜 놈의 공작으로 인해 테러 용의자로 몰리게 되고, 이에 캡틴 아메리카는 진상규명을 위해 절친 버키를 데리고 도피한다. 그리하여 캡틴 아메리카를 따르는 어벤져스의 반쪽은 범법집단이 되고, 캡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유엔 통제에 따르기로 한 아이언맨 등 나머지 반쪽과 대립하게 된다.

하여 이 두 진영은 결국 독일의 공항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기에 이르는바, 이를 보며 우리는, 다름도 아닌 슈퍼히어로물에서 사악한 붉은 별 제국이나 절대우주악당 등과의 식상한 대결이 아닌, 우리 편끼리의 대립과 싸움(즉 내전)이라는 훨씬 난이도 높은 대립구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대해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놀랍게도 이는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주의: 이하 <시빌 워>에 대한 결정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빌 워>가 ‘자체적으로 싸움을 시작할 권리 대 외부의 통제를 수용할 의무’라는 대립구도에서 멈췄더라면 결국 흔한 ‘매파 대 비둘기파’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이 모든 전개를 배후에서 만들어낸 정체·속셈불명의 나쁜 놈이 있었다.

후반까지 뭔가 음침하다는 것 외에 딱히 이렇다 할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던 이 나쁜 놈은, 영화 종료 20분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자신이 ‘소코비아 전투’로 인해 온가족을 잃은 가장이며, 자기 같은 일개 개인의 힘으로는 막강한 어벤져스를 응징할 수 없었기에 그들끼리의 전쟁을 유도·조장·알선했다는 것을 밝히며 <시빌 워>의 핵심 중 핵심으로 부상한다.

그렇다. 헛된 완력이나 공허한 카리스마를 흩뿌리는 데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 하나에만 충실한 채 그것을 차근차근 실현해나가며 마침내 캡틴 아메리카 대 아이언맨이라는 빅매치를, 절묘한 개연성과 함께 실현시켜낸 이 나쁜 놈이야말로 21세기가 바라는 나쁜 놈의 표상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더불어 자신의 슈퍼함에 도취된 채 ‘인류·지구를 구한다’ 등등의 거하기 그지없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대도시 한가운데든 민간인 밀집지역이든 전투를 벌여대며, 그곳이 보통사람들의 집이며 직장이며 생활터전이라는 것을 망각해버리곤 했던 멍청하기 그지없는 ‘히어로’들에게 경종을 울린 이 나쁜 놈의 정신은, 현재의 한반도 정세의 대변화에도 큰 울림을 낳고 있다 하겠다.

‘민간인’ 없는 히어로물은 끝났다

그렇다. 지금껏 우리는 끝내 무찔러야 할 ‘순수 악’을 설정함으로써 사람들의 불안감과 적개심을 고취시킨 뒤, 자신을 그 순수 악에 맞서는 성전을 해낼 유일한 히어로로 셀프 지목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야심과 일신의 안위를 편취해온 수많은 세력들을 보아왔다. 그리고 대단히 긴 세월 동안 우리 스스로를 ‘나쁜 놈 대 우리 편’이라는 20세기풍의 촌스러운 이분법에 가둬왔다. 그들이 목 놓아 외치는 거창하기 짝이 없는 ‘절대정의’의 미명하에 자극되고 팽창되고 첨예화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인해, 정상적인 삶의 조건을 잃는 것은 결국 슈퍼한 히어로들이 아니라 그리 슈퍼하지 않은 우리 민간인들이라는 사실을 쉽게 잊곤 했다.

하여, 정말이지 간절히 기원하건대, 우리 한반도가 이제 ‘절대 나쁜 놈 대 절대 우리 편’의 초등학적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길 빈다. 그리하여 저 머나먼 우주 별나라나 소코비아가 아닌, 우리 주변의 결코 거창하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정의, 손에 만져지는 민주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길 빈다.

물론 그럴 수 있으리라. 일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도 얻은 통찰을 우리들이 얻지 못할 리 없으므로. 진짜 ‘시빌 워’를 포함하여 멀고 먼 길을 돌면서도 끝내 목적지를 잊지 않고 결국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한 우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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