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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사랑하는 이가 떠나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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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판타스틱 우먼>


한겨레

낮에는 웨이트리스, 밤에는 재즈바 가수로 활동하는 ‘마리나’는 생일날 연인 ‘오를란도’를 갑작스레 잃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마리나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오를란도의 가족과 경찰로부터 용의자 취급을 받는다. 소니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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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애도할 틈도 없이
살인 용의자로 몰려
사랑하는 사람을 추모할 권리
지켜내기 위한 성장기


사회적 편견 꼬집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일상 그려
실제 트랜스젠더이자 오페라 가수
다니엘라 베가의 연기도 압권


<판타스틱 우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있어 곤란한 점은,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거론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겠다. 뭔가, ‘지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발언을 감히 자행하고 있는 것인가?’ 하면, 물론 그럴 리는 없고,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는 점을 얘기하고 들어가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이것이 꼭 <크라잉 게임>을 보기 전 ‘딜’(제이 데이비슨)의 생물학적 성별을 미리 얘기하는 강도의 스포일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튼 사전에 정보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영화 시작 후 20분 정도가 흐를 때까지 우리는 주인공 ‘마리나’(다니엘라 베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챌 수 없다. 즉, (실제로도 트랜스젠더인) 다니엘라 베가가 연기하는 마리나의 모습과 우리의 망막 사이에는 어떠한 필터도 개입되지 않는다. 낮에는 웨이트리스, 밤에는 가수로 일하는 그녀에게 남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레예스)가 그녀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라는 것 정도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편견

우리의 망막에 필터가 끼워지는 것은 오를란도가 한밤중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맞으면서부터다. 좀 더 정확히는 오를란도를 담당한 의사가 병실에서 나와 마리나를 대면하는 순간부터다. 의사는 거의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본 다음 “(마리나라는 이름은) 별명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이상한 질문에 이어지는 말은 좀 더 이상하다. “같이 좀 가실까요? 조용한 데 가서 이야기합시다.” 맞다. 이 말은 의사가 아닌 형사가 할 법한 말이다.

의사의 이상한 대사가 남긴 팽팽한 장력은, 오를란도의 동생에게 형의 죽음을 알린 뒤 도망치듯 병원으로부터 멀어지는 마리나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곧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이 그녀를 다시 병원으로 끌고 온다. 의사는 그녀가 이미 확정된 범죄자라는 듯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넘기고’, 경찰은 잔뜩 고압적인 태도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

신분증을 본 경찰은 마리나에게 ‘다니엘’이라는 ‘법률적’ 이름을 강요한다. 마리나가 트랜스젠더 여성임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영화가 시작된 지 25분 정도가 지난 바로 그 시점이다.

하여 우리는 영화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에 맞닥뜨린다. ‘트랜스젠더’라는 필터가 씌워지는 순간, 마리나를 보는 우리의 시야는 어떻게 변하는가?

그렇게 “왜 병원에서 도망쳤어요?”라는 경찰의 질문과 “왜 저를 잡아두려고 하는 거죠?”라는 마리나의 대답에는, 이제 새로운 의미가 겹쳐진다. 그녀는 도주하려고 한 것일까, 벗어나려고 한 것일까. 바로 여기에 마리나라는 인물의 핵심이 있음은 물론이다.

마리나의 밑바닥에 끈적한 진흙처럼 침전돼 있는 고통과 상처가 수면 위에 직접 드러나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펀치 날리기나 섀도복싱을 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녀가 중반에 던지는 “경찰은 지긋지긋해. 의사, 병원 가운, 제복 입은 것들, 전부 꼴도 보기 싫어”라는 대사 정도를 통해서뿐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고통과 상처는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온몸에 멍이 든 연인의 시신(오를란도는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 계단에서 굴러 타박상을 입는다)을 뒤에 두고 병원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그녀의 행동으로.

그것은 도주다. 그녀를 오해할 모든 준비를 마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만 그것은 마리나에게는 탈출이다. 그녀는 말하자면, 수십명(또는 수백, 수천, 수만명, 또는 그 이상)의 상대 선수와 혼자 싸워야 하는 편파적인 권투 경기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링 안에서 간호사와 의사가 저지르는 예절 바른 폭력은 여지없이 ‘합법적’이지만 불공평하고, 예외 없이 펀치드렁크를 남긴다. 그것은 필시 마리나가 일생 동안 겪어왔을 싸움이다. 마리나에게 쌓인 고통과 혐오와 분노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탈출이 불러일으킬 오해의 성가심을 우습게 능가할 정도로 큰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일하는 식당의 샛방에 있는 펀치 게임기에 주먹을 날리는 것 정도뿐이다.

<판타스틱 우먼>이 자신의 인물을 드러내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영화에는 으레 한두번쯤은 등장할 법한 플래시백이나 과거를 언급하는 대사조차 없다. 현재의 마리나만으로도 그녀를 드러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그녀를 그녀 주변의 사람들부터 그녀의 환상까지 모두 포함하여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것, 그것이 세바스티안 렐리오(각본·감독)의 권유다. 2013년 작 <글로리아>에서도 그랬듯, 렐리오는 설명하는 대신 지켜보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들을 드러낸다.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인간일 뿐

이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 <판타스틱 우먼>은 ‘세상의 편견에 저항하는 마리나의 외로운 사투’ 같은 전형적인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마리나에 대한 수사를 위해 투입된 23년 베테랑 성범죄 전문 형사(그녀 역시 여성이다)도, 의례적 절차를 가장해 알몸수색이라는 폭력을 가하는 것을 끝으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뒤로 수사 결과는커녕 수사의 존재조차도 거론되지 않는다.

공적인 영역에서 행해지는 무표정하고 세련된 폭력은, 죽은 연인의 가족들의 훨씬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고 촌스러운 폭력으로 대체되는데, 이 역시 마리나가 무찔러야 하는 궁극의 적은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 뚫고 나가야 할 진흙탕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이다.

하여 편견에 대한 사회고발로 출발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마리나의 내면 안으로 잠영해 들어가기도 하고, 속물들의 천박함을 비웃고 야유하는 풍자를 섞기도 하며, 사소해 보이지만 마리나에게는 필사적으로 풀어야 할 이유가 있는 미스터리를 파고들기도 한다. 이렇게 <판타스틱 우먼>은 관객들(누구보다도, 가장 첫번째 관객인 자기 자신)의 예상과 그것들이 불러들이기 십상인 진부함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치면서 진흙길을 헤쳐 나간다.

이렇게 한마디로 규정되는 무엇이 되지 않으려는 렐리오 감독의 의지는 거의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인데, <글로리아>에서 그가 고수했던 사실적인 어법과는 사뭇 다른 <판타스틱 우먼>의 표현적이고 양식적인 어법은 이러한 틀 벗어나기를 위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터 키턴을 차용한 ‘강풍에 맞선 마리나’ 장면이나, 마리나의 환상 속의 군무 장면 등은 그것이 가진 강한 시각적 펀치력에도 불구하고 깊은 울림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거울에 비친 인물 이미지들에서 드러나는 의도들은 종종 인공적이라는 인상마저 안긴다. 마리나가 절박하게 해답을 좇던 ‘작은 미스터리’의 결론이 내놓는 의외성이나, 주린 하이에나 떼 같던 마리나의 ‘적’들이 마리나의 반격에 보이는 겁먹은 강아지의 반응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가 계속해서 색채와 형태를 바꿔나가는 도중에도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 더 좁혀 말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추모할 권리’다. 마리나의 모든 행동은 결국 이것을 지키려는 의지에서 출발한 것인데, 그녀가 사나운 고양이과 동물처럼 폭력에 맞설 때도, 자포자기에 가까운 방황 끝에 서글플 정도로 화려한 환상에 빠져들 때도, 그것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하여 많은 모퉁이와 우회로와 어두운 골목을 지나온 끝에 <판타스틱 우먼>은 자신만의 것을 지켜내면서도 생존에 성공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성장에 안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리나(그리고 다니엘라 베가)라는 여성의 모습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그렇다. 그 마무리가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나가 부른 노래, 헨델의 아리아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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