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불편해서 찬찬히 보게 되는 곳…하늘과 맞닿은 그 섬에 가고 싶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전남 고흥 230개 섬 중 뭍사람 손 덜 탄 시호도·진지도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깝지만 쉽게 가기 어려워 온전히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곳, 바로 섬이다.

전남 고흥은 230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다. 나지막한 산과 윤기나는 초록 숲, 맑은 봄햇살이 너른 바다 위로 내려앉는 곳이 고흥이다. 아직 뭍사람 손이 덜 탄 고흥의 시호도와 진지도에서 잠시나마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 왔다.

■ 무인도, 시호도를 만나다

이름도 특이한 ‘시호도’로 향했다. 하늘과 맞닿은 갯벌을 바라보며 구불구불 10분쯤 달렸을까 내비게이션이 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을 목적지라고 가리켰다. 시호도는 동일면 구룡마을에서 직선거리로 300m가 채 안된다. 배를 타면 2분도 걸리지 않는 섬이 차분해 보였다.

“시호(尸虎)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시체라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섬 사진을 찍으면 죽은 호랑이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해요.”

구룡마을에 사는 명승만씨는 “이 동네를 지키는 아홉 마리 용이 호랑이를 물리쳐서 지금도 45가구가 잘 살고 있다”며 “저기 가면 호랑이 입(동굴)이 있는데 새벽에는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배를 타고 시호도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다에는 기다란 말뚝이 꽂혀 있었다. ‘개막이’란 전통 고기잡이를 위해 박아놓은 것이다. 갯벌에 말뚝을 타원형으로 박은 뒤 그물을 둘러놓는다. 밀물 때에는 물고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그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가 썰물에 그물을 올려 숭어와 감성돔, 오징어 등을 잡는다고 한다.

섬은 예상보다 컸고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풍광이 달랐다. 가끔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린다고 한다. 조개와 굴 껍데기들이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바닷물이 빠지면 주변 섬들로 가는 길이 드러난다고 했다. 신비스러운 자연의 섭리를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시호도의 생태숲길은 800m 정도. 원시체험마을이 아름답단다. 배꼽재를 넘어가면 원시체험마을로 가는 지름길. 배꼽재 정상이 해발 70~80m 정도밖에 안된다 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팔랐다. 그래도 홍가시나무와 야생화들이 피어 있어 지루하진 않았다.

호랑이 배꼽 부분에 있다는 원시체험마을은 근사했다. 나무에 걸려 있는 해먹에 몸을 뉘었다. 갯내음이 진하게 밀려왔다.

“원시인처럼 움막에서 지내려면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일단 물 한 방울이 안 나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힐 때만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써요. 냉난방이 안되는데 인터넷이야 당연히 못 쓰지요. 샴푸와 비누 사용도 금지입니다.”

호랑이가 누운 모습의 시호도

갯벌엔 전통 어로 ‘개막이’ 말뚝

깊은 숲과 ‘모세의 기적’ 바닷길

물·전기 없는 원시체험마을도

고려 말 수군 진지 설치 진지도

차 한 대도 없고 인터넷도 안돼

고요한 해변엔 꽃과 나비와 나


고흥군청 성원욱씨는 “당일 1만5000원, 1박2일 3만5000원을 내면 원시인처럼 불피우기, 뗏목타고 낚시하기, 갯벌에서 잡은 물고기를 직접 모닥불에 구워먹기 등 체험을 할 수 있다”며 “사전에 예약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육지로 나오기 전 정글 같은 숲을 찾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인데도 숲이 깊어 그늘이 졌다. 연둣빛 이끼는 싱싱했다. 바닷바람에 휘어진 키 작은 소나무, 새끼손톱보다 작은 나비, 화사한 진달래와 철쭉, 도라지와 영지버섯이 발끝에 차였다. 운이 좋으면 너구리, 고라니, 노루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에 오르락내리락 차진 흙을 밟으며 섬 끝까지 걸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명상의 섬, 진지도를 걷다

진지도는 연륙교가 놓여 있어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과역면 연등리 백일도에서 1㎞ 거리에 있다. 여기서 배를 타고 5분쯤 가면 진지도가 나온다. 하얀 구름이 섬을 따라 흩어지더니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고려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진지를 설치한 섬이라고 해서 진지도라고 불러요. 옛날 진지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마을 이장 김정수씨는 “지금은 5가구, 9명이 살지만 한때는 섬 분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이 30~40명이나 됐다”면서 “낙지, 숭어, 감성돔, 조개, 굴, 꼬막이 많이 잡히고 보리, 고구마, 마늘, 고추 농사가 잘되는 볕 좋은 섬”이라고 자랑했다.

43m 높이의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 서보니 순천과 여수가 지척이었다. 고흥에서 가장 높다는 팔영산(608.6m)이 우뚝했다.

진지도는 모나지 않은 둥근 섬들을 자식처럼 품고 있었다.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고 따사로운 섬에 기대고 싶었다.

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섬 한가운데 있는 숲길로 들어섰다.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네모난 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흙과 돌을 층층이 올린 것을 보면 성벽의 흔적이 분명했다. 갑자기 너른 평지가 펼쳐졌는데 수군들이 훈련하던 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해안은 적막했다. 넓게 드러난 갯벌이 매끈했다. 하얀색과 노란색 꼬마 나비들은 무섭지도 않은지 가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았다. 무화과나무와 찔레꽃을 사진에 담을 때는 고요함이 끝이 없었다. 오직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전남 광양에 사는데 두 딸과 사위, 손주랑 함께 왔어요. 낚시도 할 수 있고 소라도 잡을 수 있어 좋네요.” 고무장화를 신고 조개를 캐던 여성은 “손주가 생후 7개월인데, 올여름에 다시 찾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섬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다. 진지도에는 차가 한 대도 없다. 물은 지하수를 끓여 먹어야 한다. 전기가 들어온 지 몇 년 안됐다. 슈퍼마켓은커녕 커피 한잔 마실 곳이 없다. 휴대폰은 터지지만 인터넷은 안된다. 불편하니 찬찬히 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아마, 그게 섬 여행의 미덕이리라.

<고흥 | 글·사진 정유미 기자 youme@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