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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장성택 삼킨 '2인자의 저주'…트럼프가 김영철에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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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서 칙사 대접 받은 김영철

50년 전 푸에블로호로 미국 인연

정부 ‘천안함 폭침’ 족쇄 벗겨줘

김정은 친서 들고 대미 협상까지

군부 3인방 교체로 평양 어수선

은인자중 최용해 행보에 눈길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트럼프가 ‘파워맨’ 칭한 북 김영철 … ‘넘버2의 저주’ 비껴갈까
북한 권력에 ‘2인자’란 없다. 최고지도자인 수령의 유일영도만이 지배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 ‘넘버 2’로 불린 인물은 예외 없이 시련을 겪거나 몰락했다. 김정은의 ‘군부 과외교사’로 불린 이영호 총참모장이 그랬고, 조카 김정은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무소불위 권한을 휘두른 장성택도 마찬가지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롤러코스터의 정점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건 찰나에 가깝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주 ‘북한에서 두 번째로 힘이 센 사람’으로 콕 집어 말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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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1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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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올림픽 폐막식 참석차 지난 2월 서울에 온 김영철(72) 당 부위원장은 서울 롯데월드타워에 오를 뻔했다. 우리 관계당국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겠다는 심산에서 참관 일정을 짠 것이다. 지상 123층에 높이 555m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는 지난해 4월 개장 당시 세계 5번째의 고층 건물로 꼽혔다. 서울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이곳과 함께 대규모 복합쇼핑몰인 하남 스타필드까지 보여주려던 계획은 ‘천안함 폭침 도발의 주범’이란 국민의 곱지 않은 여론 때문에 결국 불발됐다.

김영철이 마천루를 방문한 건 지난달 31일 미국 뉴욕에서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로 방문한 김영철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장소는 맨해튼 38번가 코린티안 콘도미니엄에 있는 유엔 주재 미국 차석 대사의 관저. 뉴욕 번화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말로만 듣던 랜드마크를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직접 소개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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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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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은 칙사 대접을 받았다. 뉴욕의 관문으로 불리는 JFK 공항에 도착할 때 미 공안 당국은 취재진이 진을 치던 VIP 통로까지 피해가며 6~7대의 캐딜락 세단을 동원한 특급의전을 제공했다. 국무부 경호차량이 에스코트를 펼쳤다. 미국 측의 배려는 1일 백악관 방문 때 최고조에 달했다. 김영철이 들고 온 김정은 친서에 트럼프는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답했다. 북한이 껄끄럽게 생각하는 펜스 부통령과 볼턴 안보보좌관을 배석 인사에서 뺀 것도 김영철 환대로 해석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영철 일행을 직접 환송하며 차에 오를 때까지 지켜봤다.

김영철이 미국과 인연 아닌 인연을 맺은 건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초 북한 15사단 비무장지대(DMZ) 민경중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김영철은 1968년 소좌(우리 군의 소령에 해당) 계급으로 군사정전위원회 연락장교로 일한다. 바로 그때 미 해군 소속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인근 해역에서 북한에 피랍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82명의 미 해군 승조원이 11개월 억류됐다 풀려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북·미 간 협상 막전막후를 김영철은 현장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이후 1980~90년대 남북 대화가 이어지며 김영철은 군부 대남통으로 자리했다. 남북 고위급 회담 북측 대표와 군사분과위 북측위원장 등을 거치며 ‘회담 일꾼’으로서 경력을 쌓았다. 그와 상대한 우리 회담 관계자들은 경륜과 순발력을 갖췄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나 협상술에는 부족함이 있는 인물이라고 기억한다. 대남 콤플렉스와 과시욕도 드러냈다. 회담장에 펜 하나만 달랑 들고 들어와,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우리 측 인사에게 “뭐 복잡한 얘기 한다고 그런 걸 잔뜩 챙겨오냐”며 기선잡기에 나선 적도 있다고 한다. 2006년 중장(북한군 계급으로 별 둘)으로 갓 진급한 뒤엔 우리 측 준장급 수석대표에게 “아직 별 하나냐”라며 으스대곤 했다는 것이다. 한용섭 전 국방대 부총장은 “김영철은 자주 바뀌는 우리 협상자들에게 ‘공부 좀 하고 오시오’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북 군사회담에 주로 등장했지만 김영철은 북·미 간 이슈도 계속 다뤄야 했다. 장성급 회담 대표 등을 맡으며 한·미 합동군사연습이나 주한미군 문제 등을 체득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현장형 회담 전략가인 김영철이 2009년 정찰총국장을 맡으며 키운 정무적 감각을 바탕으로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자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2010년 3월 46명의 우리 해군 장병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폭침 도발은 정찰총국장 김영철이 주도한 것으로 지목됐다.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그를 제재대상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평창 겨울올림픽에 즈음한 화해 무드는 족쇄를 풀어버렸다. 김영철을 대남·대미 책사로 활용하려는 김정은의 복안에 이끌린 문재인 정부가 ‘증거 불충분’으로 훈방 조치한 셈이다. 분명한 건 김영철의 서울·평창 행차가 제재로 불발됐다면 워싱턴행은 꿈꿀 수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김영철 방미를 보는 평양의 기류는 미묘하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 등 선전매체는 함구하고 있다. 18년 전 가을 김정일 특사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만난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때 떠들썩했던 보도와 차이가 난다. 얼마 전까지 2인자로 꼽힌 최용해 당 부위원장은 은인자중한다. 어제자 노동신문은 그가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등 황북 지역 경제현장을 둘러본 것으로 전했다.

최용해는 올 들어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북·미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한발 물러선 형국이다. 하지만 빨치산 2세(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인 최 부위원장은 북한 권력에 일정한 지분이 있는 듯하다. 지난해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된 그는 즉각 군부 핵심인 총정치국에 검열의 칼날을 들이댔다.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전 국가보위상이 숙청당했다. 2014년 최용해가 갖고 있던 총정치국장과 국방위 부위원장 자리를 앗아간 황병서에게 앙갚음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지금 평양 권력 핵심부는 살얼음판이다. 지난달 말 총정치국장이 넉 달 만에 다시 교체된 데 이어 이달 총참모장과 인민무력상 경질이 포착돼 군부 핵심 3인방이 모두 물갈이됐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군부 온건파 기용이라고 넘기기엔 찜찜하다. 평양에 돌아간 김영철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이런 배경에서다. ‘미제 침략자를 소멸하자’는 구호를 평생 되뇌며 살아온 김영철에게 있어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는 어색함 자체였다. ‘철천지 원수’ 미국으로부터 체제보장을 받겠다며 공들이는 건 아이러니에 가깝다.

‘워싱턴 리포트’를 받아든 김정은 위원장 판단이 김영철의 명운을 가를 공산이 크다. 적어도 북·미 정상회담 약발이 유지될 가을까지는 끄떡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조명록 특사처럼 2010년 심장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진짜배기 충신’으로 남는 요행을 기대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북한 권력에서 누군가 ‘2인자’로 불리는 순간 비운의 그림자는 문턱을 슬며시 넘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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