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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법원행정처 요원들’은 모두 양승태의 ‘로완 중위’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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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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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후보자이던 2011년 9월6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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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조팀에서 법원을 담당하는 김민경 기자입니다. 지난해 4월부터 법원 취재를 시작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우리 사회 정치·경제의 최고 권력자들이 피고인석에 서는 걸 지켜봤습니다. 하나만도 벅찬 재판을 수십 개씩 챙기며 법원 기자로서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난달 25일부터 법정에 한 번도 못 가고 있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조사결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을 거래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가 다수인 전국 법원장들은 “재판 거래는 없었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지금은 그들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를 인정한 2심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재항고 기각 결정은 양측(청와대·대법원)에 윈윈의 결과가 될 것’,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을 인정한) 항소심 판결 선고 직후에 비공식적 라인을 통하여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충분한 설명·설득.’ 특조단조차 이런 내용이 담긴 문건들을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 한 흔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의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재산까지 뒤지거나 동향을 살피고, 인사 불이익을 검토하는 한편 자의적으로 분류한 성향에 따라 적색, 청색, 흑색으로 분류해 행정처는 ‘사법부의 국정원’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사법부 신뢰를 무너뜨린 이 문건들은 다름 아닌 판사의 손으로 작성됐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문건을 작성했을까요? 10년차 이상의 판사 중에는 행정처 심의관이나 실장을 겸임하면서 재판을 잠시 떠나 사법행정에 참여합니다. 특조단이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거나 부적절하다고 평가한 문건 작성에는 18명의 판사가 참여했습니다. 특조단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 대법관으로 제청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심의관들은 인식했고, 그에 따라 임 전 차장이 선호하는 문서스타일을 보고서에 넣으려고 노력했다”며 2012년 12월부터 2017년 7월까지 작성된 410건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문건 작성의 책임을 임 전 차장의 탓만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그대로 믿더라도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를 지키려 노력해야 할 판사들이 ‘대법관이 될 윗분의 눈치’를 본 사실이 드러납니다. 게다가 조사보고서에 나오는 일부 심의관들은 ‘부당한 지시의 피해자’로 보기 어렵습니다. 정다주 당시 기획조정심의관(현 울산지법 부장판사)은 2015년 2월 서울중앙지법 판사로 돌아간 뒤에도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사법부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고 썼습니다. 시진국 기획제1심의관(현 창원지법 통영지원 부장판사)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을 ‘청와대 설득방안’(상고법원 입법의 필요성)으로 활용할 것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재임 때 사법연수생 수료식이나 판사 간담회에서 <조선일보> 칼럼에 소개된 적이 있던 ‘로완 중위’를 자주 언급했다고 합니다. 로완 중위는 19세기 말 미국·스페인 전쟁 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반군 지도자 가르시아 장군에게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편지 전달 임무를 맡았습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로완 중위가 임무를 부여받으면서 장군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책을 찾아 즉각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것이 법관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라고 강조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은 채 윗분들의 지시를 실행했던 행정처 판사들은 양 전 대법원장의 로완 중위였습니다. 황병하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통신망(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이들을 ‘재판도 하지 않는 행정처의 요원’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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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참담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이 같은 지시를 거부하며 사표까지 제출했던 이탄희 판사 덕분에 세상에 폭로됐습니다. 지난해 전국 법원의 수많은 판사들도 판사회의를 열어 진상 규명에 힘을 보탰습니다. 조사결과 발표 뒤 “엄정한 수사”, “성역없는 수사”를 요구하는 판사회의 의결도 1주일 동안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법부 스스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이번 사태를 부끄러워하는 판사들이 아직 있는 한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모두 거두어들일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김민경 사회1에디터석 법조팀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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