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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박그네를 감옥으로’ 부른 황현의 투병…“우리가 손 내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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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운명에 무릎 안 꿇어”…김호철-윤민석의 슬픈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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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각종 투쟁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를 만들어 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김호철과 윤민석씨입니다. 이들의 노래는 노동자 등 약자들의 투쟁 현장과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끌어온 강력한 무기이자, 싸우는 사람을 보듬는 따스한 이불입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음악 동지(아내)의 목숨을 위협하는 병마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둘의 연대는 깊어갑니다.

“♬♬ 박그네를! 감옥으로!

박그네를 감옥으로 MB도 검찰도 깜빵으로
재벌과 쌈싸미 권력 새누리 공범 모두 다 깜빵으로
노동자 총파업 투쟁으로 민중의 짱돌과 곡괭이로
무당 정권 도둑 권력 박그네 체포 (후략)♬♬”

“♬♬하야 하야 하야

하야 하야 하야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냐?
근혜 순실 명박 도둑 간신의 소굴
범죄자 천국 서민은 지옥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후렴)
하야 하야 하야 하야하여라!
박근혜는 당장 하야하여라!
하옥 하옥 하옥 하옥시켜라!
박근혜를 하옥시켜라!(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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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그네를 감옥으로’ 부른 황현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때 전국의 광장에 울려퍼졌던 노래 두 곡이다. 앞의 노래는 김호철(58·본명 김수호·이하 호칭 생략) 민중음악 작곡가가 만든 ‘박그네를 감옥으로’이며, 뒤의 노래는 윤민석(54·본명 윤정환)의 ‘이게 나라냐 ㅅㅂ’이다. ‘이게 나라냐’가 2016년 11월 8일에 먼저 나오고, ‘박그네를 감옥으로’는 이틀 뒤인 11월 10일에 배포됐다. 두 곡 모두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구속을 요구했다. 당시는 정치권조차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할 정도로 어수선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되돌아보면 노래가 가장 먼저 현직 대통령의 처벌이라는 근본적 요구를 내걸었고, 결국 관철시켰던 셈이다.

유달리 추웠던 그해 겨울 광장을 뜨겁게 만들었던 민중음악의 거목인 두 사람은 요즈음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다. 오랜 음악동지이자 김호철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인 황현(47)이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가수이자 김호철의 아내인 황현은 지난 4월 몸 속에 커다란 희귀암이 자라 있는 것이 발견돼 급하게 수술받았지만, 다른 장기와 뼈로 전이된 상태다. 아내의 투병을 바라보는 김호철은 “자책감과 무력감에 심신이 무너져”(윤민석) 있다. 이런 그에게 윤민석은 “형 힘내, 나를 봐. 모델이 바로 옆에 있으니 포기하지 마”라는 내용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매일 보낸다.

황현은 1990년대초부터 각종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초기에 부른 노래 중 하나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다. ‘박그네를 감옥으로’ 음원에는 그와 박은영, 박준의 목소리가 담겼다. 박근혜 탄핵집회 때는 ‘다름아름’(박은영과 함께 만든 듀오)의 이름으로 광화문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도 여러번 섰다.

음악공부 경험없는 두 민중음악가
80년대말부터 노래운동에 앞장
‘파업가’ ‘전대협 진군가’로 유명
각각 만든 박근혜 탄핵가도 인기

민중가수와 결혼 닮은꼴 행보
동지인 아내 투병 같은 운명
김호철-황현 돕기’ 윤민석 앞장
“호철 형, 내가 모델이니 힘 내”


황현이 노래운동을 시작한 것은 1990년 숙명여대(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교내 노래패인 ‘한가람’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항상 밝고 씩씩했던 그는 누구보다 노래패 활동에 열심이었다. 서울지역대학노래패연합(서대노련)과 1992년 백기완 후보 선대본부의 문선대에서도 활발하게 노래했다. 서대노련에서 당시 민중음악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호철을 강사로 초빙했고, 이 때 김호철과 황현은 처음 만났다. 운동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한 두 사람은 1994년 동지적 부부가 됐다.

황현은 수술 후 힘든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주에 박은영 등과 함께 음악 공동체 ‘일과 노래’가 만드는 음원 녹음작업을 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았을 때 녹음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힘들지만 노래를 하겠다고 현이가 먼저 얘기했다.”(박은영)

황현의 발병 소식을 들은 윤민석은 한동안 문을 닫고 있었던 페이스북을 다시 열었다. “언제나 낮은 곳에서 싸우는 이들과 함께 해온 두 분(김호철, 황현)이기에, 참으로 속상하지만 당연하게도 보험 같은거 들어둘 여력이 없었던 탓에 지금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마도 호철이 형은 병원 근처 흡연구역에 가서 혼자 줄담배 피우며 아내의 수술이 잘 끝나길 기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치료비와 온갖 걱정에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며 눈물을 훔치고 계실 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ㅠㅠ 저 또한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아내를 살렸던 처지에 페북을 다시 열어 이런 청을 올리는 것이 외람되고 송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께 엎드려 간절히 도움을 청합니다”(4월10일 윤민석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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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석과 김호철 계좌를 오간 1천만원


윤민석은 자신의 텅빈 지갑부터 털었다. 한 단체가 창작공간 지원금으로 준 6개월치 월세(390만원)와 ‘김호철·윤민석 후원 600인 프로젝트’(대표 정연탁)가 지난 3개월 동안 보낸 후원금 200여만원을 내놓았다. 윤민석이 앞장선 모금활동으로 황현은 1차 수술은 무사히 마쳤다.

윤민석도 민중가수인 아내 양윤경의 암투병으로 벼랑 끝에 선 적이 있다. 결혼 전에 유방암을 앓았던 양윤경은 2011년 암이 재발했다. 치료할 돈이 없어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봐야만 했던 윤민석은 2012년 8월 트위터에 “누가 1억만 빌려주세요. 아내 좀 살려보게요. 아내가 낫는 대로 집 팔아서 갚을게요”라는 글을 올렸고,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1억5천만원의 돈을 모았다. 또, 김호철 등 음악 동료들은 윤민석을 위한 후원 음악회를 열었다. 덕분에 양윤경은 무사히 수술을 마쳤고, ‘뼈까지 전이돼 회복할 희망이 없다’는 진단을 극복했다.

김호철과 윤민석은 1980년대 후반부터 늘 싸움이 있는 삶의 현장을 몸으로, 또 노래로 지켜온 투사다. 스스로를 ‘노동해방의 나팔수’라고 말하는 김호철은 주로 노동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1988년에 만든 불후의 노동가인 ‘파업가’를 비롯해 ‘전노협 진군가’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노동조합가’ ‘잘린 손가락’ 등이 대표곡이다. 그의 노래는 고상하거나 고급스럽지 않고, 트로트나 군가풍으로 쉽고 간명하다.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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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석은 학생운동을 위한 노래를 많이 만들었다. 1987년 6월항쟁 때 만든 첫 민중가요인 ‘사랑하는 동지에게’를 비롯해 ‘전대협 진군가’ ‘통일의 꽃’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백두산’ 등이 그가 학생 시절 만든 대표곡이다. 그의 노래 역시 비장하면서도 따라부르기 쉬운 게 특징이다. 윤민석은 2000년대 이후에도 ‘헌법 1조’와 ‘너흰 아니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 사회적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노래를 만들어 집회 현장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한 사람(김호철)은 이른바 민중민주 계열(PD), 다른 한 사람(윤민석)은 민족해방 계열(NL)이지만, 두 사람은 영혼의 지기라고 할 정도로 친하다. “두 사람은 민중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것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게 너무 비슷하다. 소울메이트다.”(이사라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네크워크 집행위원) “둘은 통하는 데가 유난히 많다. 서로 쿵하면 척하고 안다.”(박은영)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989년에 김호철이 ‘노동자 노래단’을 만들어 활동할 때였다. 김호철이 당시 학생이던 윤민석을 노동자 노래단으로 불렀다. 윤민석은 거기에서 작곡도 하고, 기타와 건반을 담당했다. “‘통합, 통합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 만큼만 하라고 해’라고 둘이 농담을 자주 한다. 처음부터 잘 통했다. 형은 낯가림이 많은 성격이지만, 노동자와 장애인 문제 등 약자를 위한 싸움에는 불 같다. 그런 형을 존경한다.”(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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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석이 아내 치료비로 시민들이 보낸 후원금(1억5천만원)이 생겼을 때였다. 그는 필요한 돈보다 더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상의한 끝에 5천만원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쌍용차 해고 노동자 등에게 1천만원씩 보내고, 그 중 1천만원은 자신처럼 빈털터리 음악가인 김호철의 계좌로 송금했다. 김호철은 “죽어도 받을 수 없다”고 다시 윤민석 계좌로 넣었다. 둘 사이를 오가던 1천만원은 결국 들불장학회로 갔다. 들불장학회는 산재와 해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자녀들을 위해 만든 것으로, 박준과 권영주, 연영석, 다름아름 등 민중가수들이 기금 마련을 위해 2002년부터 매주 월요일 명동성당 앞에서 거리 공연을 벌이고 있다.

김호철이나 윤민석은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한 적이 없다. 김호철은 한국체육대학교 태권도학과 출신이다. 소아마비인 형 김록호(사당의원 전 원장)를 놀리는 애들을 혼내주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 등 운동을 했다. 정의감이 강했던 체육학도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독재를 만나 민주투사로 변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한국체육대학교 학생자치회장으로 민주화투쟁에 참여했으며, ‘서울역 회군’을 반대하다 투옥 뒤 강제징집을 당했다. 타고난 청음 실력 덕분에 군악대에 뽑혀, 군 생활 3년 내내 트럼펫을 불었다.

김호철은 제대 후 복학을 거부 당하자, 밤무대에서 트펌펫을 불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던 여동생을 따라 서울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 노동자의 삶을 걸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할 때) 이렇다 할 노동자 노래 하나 갖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워 노래작업도 함께 했다. 그 때 만들어진 노래가 ‘단순조립공’ ‘X에게’ ‘포장마차’ 같은 노래였는데, 내내 지겹게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기)만 불러대던 현장 노동자들이 참 좋아했다. 그래서 근거지를 문화국으로 바꿔 활동하게 됐다. ‘흩어지면 죽는다~’로 시작하는 ‘파업가’, ‘딸들아 일어나라’ 같은 노래가 본격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면서 만든 곡들이다.”(김호철, <함께걸음> 20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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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손 잡아줄 때” 다음달 후원주점


1984년 한양대(무역학과)에 입학한 윤민석도 처음에는 학생운동과 거리가 멀었다. 학교 앞 음악다방과 이태원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반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던 평범한 대학생이 변한 것은 2학년 때 광주항쟁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그는 한양대 노래패(소리개벽)에 참여했다. 1989년 그가 만든 ‘전대협 진군가’는 1990년대까지 학생들의 투쟁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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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활동가들은 지난달 서울 홍대앞 클럽에서 후원 음악회를 연 데 이어 다음달 21일 후원주점을 준비하고 있다. 윤민석은 2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제 아내도 병원에서 장례 준비하라고 말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호철이 형과 형수가 하루빨리 투쟁 현장으로 복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후원주점을 준비하는 이사라는 “민중가수들이 오랜 세월 투쟁 현장을 지켜줬기에 노동자와 시민들도 그동안 많은 힘을 얻었다. 이제는 힘든 시간을 보내는 그들에게 우리가 연대의 손을 내밀 때”라며 “문화예술활동가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대안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호철은 “동료와 시민들의 따뜻한 마음과 도움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희망이 매우 희박한 상태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고 한다”고 말했다.

#‘문화활동가 황현 쾌유를 위한 후원주점. 7월21일 오후 6시, 서울 을지로 태성 골뱅이.
우리은행 749-124301-02-001 황현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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