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파미르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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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트에서 민박집으로 돌아온 날 밤 간간이 후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에는 온 집을 뒤흔드는 폭풍이 몰아쳤다. 양철 지붕을 때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잠을 깨고는 다시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산속에 둔 ‘바람’은 지금 얼마나 추울지. 녀석은 낮은 곳에서 와서 털은 짧고 덩치만 크다. ‘덮개라도 덮어주게 가까이 매어둘걸, 안장깔개를 내리지 말걸.’ 비바람이 거세질수록 걱정도 커지고, 기어이 눈 뜬 채로 새벽을 기다린다. 누군가를 아끼다 보면 결국 그로 인해 잠 못 이루는 날이 온다. 매일 일어나는 자잘한 일상을 통해 나는 서서히 파미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언젠가 여기를 떠나겠지만, 여기서 겪었던 모든 일 때문에 혹은 이곳에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상 때문에 잠 못 이룰 것이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낙원이 있다. 그것은 낙원이므로 성격상 전혀 현실적일 수 없고, 어두운 면은 애써 보지 않기에 객관적이지도 않다. 막상 열어보면 텅 빈 보석 상자, 아니면 가까이 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은 최소한 나에게는 감추어진 고귀한 인간성이 한꺼풀씩 드러나는 가능성의 보고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에 눈감음으로써 생긴 환상이 아니라, 혹독한 환멸의 바람에 조금씩 섞여 날아오는 가느다란 희망 줄기들을 모아 구성한 것이다. 그 위대한 영국인에 대한 모독일지 모르지만 나는 파미르에서 거의 매일 조지 오웰을 떠올린다. 파시스트의 총탄에 목을 관통당하고 검열을 피해 달아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사실 그들(스페인인)은 20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다. 이 점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라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견딜 만한 형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카탈로니아 찬가>,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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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20년 전에 사라진 낙원
그에게 카탈로니아(카탈루냐)는 자본주의와 파시즘이라는 환멸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낙원이었을 것이다. 파미르 키르기스인들과 살다 보면 은연중에 그들이 21세기에 속하지 않는 고귀한 종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는 내전 중도 아니고, 나를 검열할 사람도 없다. 기본적으로 느슨한 곳이라, 여기서 나는 그 영국인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인간의 가치를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언덕 끝에서 폭풍을 마주한 사람처럼, 꼭 그 영국인처럼 잠 못 드는 까닭은 가까운 시일 내에 21세기 저지대에서는 이미 찾아보기 힘든 어떤 고귀한 종족의 낙원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20년 전부터 중국에서 낙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아왔다. 그 영국인이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중국에 대해 온갖 나쁜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거의 없다. 중국 쪽 톈산(천산·天山)은 목축민의 낙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디를 가나 가슴을 할퀴는 듯한 끔찍한 철조망이 격자형으로 초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옛날 진시황이 장정 서넛이 모이기만 해도 그들을 군도(群盜·떼도적)로 사갈시했듯이, 군도가 아닌 그들은 군도처럼 해체당했다. 초원에서 모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한때 그곳에서 말을 타고 모이는 이들의 총칭은 마적(馬賊)이었다. 그러니 내가 이곳을 잃어버릴 수 없는 인간성의 낙원으로 여기는 것도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곳은 세상 어디에도 다시 없으므로.
풀밭에 누워 위를 쳐다보면, 새파란 색을 배경으로 구름이 일으키는 변화는 끝이 없어 마치 온 하늘이 격랑을 일으키며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다. 너무 집중하여 중력이 잊힐 때, 하늘로 오르는 새는 포말을 거슬러 오르는 작은 물고기가 되고 내 몸도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착각한다. 이런 곳이 세상에 다시 있을까? 여기서는 이런 말들이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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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없어?” “당연히 있지. 어제도 빙하 아래서 두 마리 봤어.” “늑대가 양을 잡아먹지 않아?” “여름에는 마르모트(마멋)가 천지인데 뭐 하러 사람 사는 데로 오겠어.” “키르기스인은 마르모트를 먹지 않아?” “잘 안 먹지. 약으로만 써.” “마르모트 구멍 때문에 말이 위험하지 않아?” “피해 다니면 되지.”
“가축이 살이 오르면 가축 가격이 떨어져. 그 무렵 타지크 사람들이 오거든.” “가축이 세관을 통과할 수 있어?” “경비병이 잠들 때 몰래 넘어오는 거지. 여권이 없어도 물어보지 않는 곳은 사리모골밖에 없거든.”
“왜 사람들마다 가진 대지 면적이 다르지?” “처음 분배할 때는 같았지. 타지크 상황이 안 좋아서 거기 살던 키르기스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정착했어. 800명 정도 될걸. 그들에게 땅을 줬지. 지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
한여름 마르모트와 늑대는 인간의 간섭 없이 그들만의 리그를 즐긴다. ‘외국인’이 밀려와 가축 가격을 떨어뜨려도 따지지 않고 땅을 나눠 가지고, 정착하면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왜, 타지크에서 온 이들이 사리모골로만 모이는 거야?” “온 파미르에서 여기만 감자가 자라거든. 그리고 여기만 가축 시장이 있고. 그래서 먹고살 수 있어.”
목초지 쫓아온 외국인 때문에
살 오른 가축 값 떨어져도
배척커녕 땅 나눠주고
정착하면 이웃으로 받아주네
사탕 얻은 아이들은
산을 종일 뒤져서라도
식용 풀 꺾어다 주는 곳
아,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함이여
나는 마무르를 비롯한 몇몇과의 대화를 한 자씩 옮겼을 뿐 한 글자도 지어내지 않았다. 이것을 2018년 6월 지구상 어디에서 실제로 있었던 대화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 논쟁을 알고 있다. 고향에서 쫓겨나 오직 살고자 맨몸으로 인간이 사는 땅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그 살벌한 태도. 이럴 때는 오웰이 영국을 떠나 스페인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을 때와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가난과 탄가루 오염 등 아픔도
거기에는 단순하지만, 어떻게 해석해도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투르파르는 원래 엄청난 말이었대. 다른 말들이 하루 수십킬로미터를 간다면 투르파르는 수백킬로미터를 달리는 말이었지. 그 말이 어느 날 이곳(투르파르 켈)으로 달려왔지. 그런데 그때 여기는 물이 없었대. 그래서 투르파르가 말굽으로 땅을 내리치니 물이 솟아났대. 그런데 투르파르는 끝없이 솟아나는 물에 잠겨 죽어버렸대.”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하면 투르파르는 전마(戰馬), 전쟁과 인위적인 힘의 상징이다. 거대한 인위적인 힘을 증명하는 순간 자연은 그것을 무(無)로 되돌려버렸다. 힘 가진 자는 문득 모골이 송연할 것이다. 제의(祭儀)적으로 해석하면 투르파르는 만물에게 생명을 선사하고 사라진 희생양이다. 투르파르 켈은 이 초원을 푸르게 하고 짐승에게 물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태초의 희생을 통해 생명을 주는 물이 나타났다! 서사시로 해석하면 투르파르는 비극적인 문명 영웅이다. 물이 있어야 인간이 깃든다. 그는 물을 선사했지만 영웅이기에 사라져야 한다. 자신이 가져온 물에 의해. 이야기를 찾은 나에게 여기는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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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송아지가 닭을 쫓아가고, 덩치 큰 말이 강아지처럼 땅에서 뒹구는 우스꽝스러운 일상이 있고, 높낮이와 방위의 차별이 없어 들어가 앉으면 누구나 친구가 되는 원형의 유르트가 있다. 그리고 여기는 어떤 이방인도 허락 없이 자기 말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동의 목초지가 있다. “말이 지쳤다. 저 산으로 가자. 거기 좋은 풀이 있다.” 장거리 여행을 할 때면 흔히 듣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쩌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몇개 주면 녀석들은 산을 뒤져 하륵 귈을 꺾어 온다. 그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꺾어주신 찔레같이 물기 많고 그보다 상큼한 식용 풀이지만 산에서 드물다. 녀석들은 당나귀를 타고 온 산을 헤집었을 것이다.
투육 계곡의 으르스바이 아저씨는 최고의 경험을 가진 목동이지만, 그가 말을 건네는 방법은 그윽하다. 내가 그의 유르트에 갔던 첫날 저녁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국, 저 얼룩말을 타고 나랑 소 몰러 가자.”
두살짜리 얼룩말은 털이 비단결이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언덕을 오를 때는 육중한 내 몸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아저씨는 언덕에서 천연스레 농을 건다.
“우리 얼룩이하고 자네 말을 바꿀까?”
나는 파안대소를 하며 받았다.
“좋지만, 저 녀석은 제 동생이라서 바꿀 수가 없어요.”
아저씨도 슬며시 웃는다. 그날 이래 친구들은 ‘바람’을 ‘자네 동생’이라 부른다. 아저씨의 유르트가 있는 투육은 7월에 초원으로 올 우리 가족이 머물 곳이다. 얼마 후 마무르가 귀띔해줬다.
“아저씨가 애들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네. 저 얼룩이로.”
아저씨는 그렇게 얼룩이를 내게 선보인 것이다. 이런 대화법이 다른 곳 어디에 또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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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낙원의 실상을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2년 만에 이가 다 빠져버렸어. 광산에서 일한 지 딱 2년 만에.”
혹독하고 긴 겨울과 가난. 석탄은 가장 싸기에 겨울을 함께하는 친구다. 마을 동편의 탄광에서 때로는 시커멓고 때로는 허연 먼지가 동풍이 불면 사리모골을 덮치고 서풍이 불면 알차 불락을 덮친다. 먼지를 차단하는 조치를 하면 당장 석탄값이 오른다. 1톤에 3천 솜. 그 이상의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데 왜 이가 다 빠졌을까? 혹시 중금속이 함유되어 있는 것 아닐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면 새까만 얼굴과 대비되는 새하얀 이 때문에 더 선량해 보이는 친구 졸드바이가 떠올라 몸서리쳐진다. 그는 이제 탄광 일을 하지 않지만 수입도 없다. 내 말의 징을 박아준 무라트도 일을 찾아 러시로 떠났다. 또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그 아저씨는 탄광에서 20년 일했어. 돈을 조금 벌었지. 그러데 지금은 폐가 완전히 망가졌어. 고기도 마유주도 못 먹어. 매일 끓인 물과 마른 빵, 그리고 알약을 한 줌씩 먹어야 해.”
그렇게 누군가는 20년 번 돈을 알약값으로 지불하며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쏟아져버린 이, 망가진 폐, 어쩌면 중금속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그 그악스러운 먼지에 시든 풀, 그리고 석탄재가 듬뿍 들어간 물. 석탄 가격에는 이 모든 것이 들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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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맞선 키르기스 기병
그러나 이곳은 아직 중국처럼 초원이 사막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철망으로 나눠지지도 않았다. 그 영국인은 ‘인간의 조건’을 찾아 스페인 혁명의 와중으로 들어갔듯이 나도 ‘지구인의 조건’을 위해 작은 일을 하고자 하는 차, 6월에 계약을 빌미로 위로차 초원을 찾은 모 출판사의 대표가 선뜻 제안했다. 먼지 폭풍을 목격한 후였다.
“여기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자. 자네가 나서면 우리 출판사가 적극적으로 도울 게. 먼저 모델을 만들어보자.”
여기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만한 돈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면 못할 일은 없다. 우리의 계획은 순식간에 섰다. 출판사는 계약금을 ‘아주’ 많이 주기로 약속했다. 공 모 작가는 먼저 계약금과 인세를 출연하여 모범을 보이고, 출판사는 이에 호응하기로 했다. 작가의 아내는 ‘이런 일을 왜 신문으로 알아야 하느냐’고 잠시 타박하겠지만, 곧 그 천성대로 지지할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이뤄지려면 공 모 작가가 걸작을 써야 하므로, 그는 좀 더 열심히 살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낙원 같은’ 이야기를 비웃으며 파미르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곳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냉소로는 언덕이 되고 산이 되어 물을 모으지 못하고 결국 사막으로 남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가 일본 파시스트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 키르기스 기병들이 녹슨 칼을 들고 파시스트의 심장으로 돌격했다는 사실을. 칼과 기관총의 대결, 그것은 고귀한 시대착오였다. 그때 돌아오지 못한 다수는 아마도 으르스바이 같은 은근한 사내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줬으면 한다. 어쩌다 섬세한 자연의 메커니즘이 깨져 파미르의 눈 녹은 물이 사라지면, 저 아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의 농부들이 피눈물을 흘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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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원국 작가/탐험가/역사·인류학 연구자. 동양사(학사), 중국경제(석사)를 공부했고 지금은 유목인류학(박사과정)을 연구하고 있다. 2018년 현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목축 지대에서 생활하며 현장조사를 수행 중이다. <춘추전국이야기(1~11)>,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중국의 서진>, <말, 바퀴, 언어> 등을 옮겼다. 짐승에 기대어 옮겨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격조의 삶을 모색하는 글을 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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