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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박수찬의 軍] 지지부진한 북미 대화, 미군 유해송환으로 풀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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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2004년 9월 이라크전쟁에서 전사한 미국 해병대원 챈스 팰프스 일병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간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 챈스 일병의 귀환(Taking Chance, 2009)에서는 “당신의 헌신에 감사한다”(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대사가 계속 등장한다.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싸우다 전사한 장병의 유해를 정성을 다해 고향까지 운구하는 모습, 유해 송환과정에서 마주친 수많은 미국인들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전사자 유해 송환이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의미는 6.12 북미정상회담 직후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에 돌파구로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6~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과 김영철 북한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간의 북·미 고위급 회담이 양측 의견 대립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북미 대화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27일 북한이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함으로서 북미 대화에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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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주한미군 사제가 북한에서 송환된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55구를 싣고 오산 주한미국공군기지에 도착한 C-17 수송기에 올라 유엔기에 싸인 채 놓여있는 유해 상자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 제공


◆유해 송환, 北에 대미 관계 시험지 역할

북한 지역 내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공동발굴과 송환은 오랜 세월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온 가족에게 유해를 돌려주는 인도주의적 성격의 사안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북한에게 미군 유해 공동발굴과 송환은 미국과의 관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 성격을 갖는다. 적대관계인 북한과 미국 군인들이 북한 지역에서 함께 작업하는 것인 만큼 북미 관계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미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이면 유해 공동발굴과 송환이 이뤄졌지만, 긴장관계에 접어들면 중단됐다. 1차 북핵 위기가 제네바 합의로 해소된 이후인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북한은 미국과 함께 미군 유해발굴과 송환작업을 했으나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고농축우라늄(HEU) 논란 등으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고 1차 핵실험 등 도발이 이어지자 중단됐다. 2011년 10월 태국에서 유해 발굴 재개에 합의했지만 2012년 4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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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장병들이 27일 오전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6·25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를 싣고 경기 오산 미 공군기지에 도착한 C-17 수송기에서 전사자 유해가 담긴 상자를 옮기고 있다. 오산=사진공동취재단


이번 송환을 계기로 6.25 전쟁 미군 유해 공동발굴과 송환이 본격적으로 재개되면 북한은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북한은 유해 송환 협상을 지렛대 삼아 2009년 3월 이후 단절된 유엔군사령부와의 장성급 회담을 9년만에 재개해 폼페이오-김영철, 성김-최선희 외교라인에 이어 군사라인을 추가 확보했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종전선언을 실현하려면 군사 분야 대화가 필요한 만큼 장성급 회담 채널을 미리 만들어두면 종전선언 논의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

북한 내 미군 유해 공동발굴작업은 수 년에 걸쳐 진행된다. 수십명의 미군이 북한에서 작업하면 낮은 단계에서나마 미군과 북한군이 빈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고, 이는 상호 이해와 신뢰 증진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 지역에 미군이 머무르는 동안에는 지난해같은 군사옵션 위협도 억제할 수 있다. 북미 관계 변화에 따라 유해 발굴 및 송환 작업 일시 중지와 재개를 반복하면 대미 압박 카드로 활용할 여지도 있다.

북미 정상회담 합의사항인 미군 유해송환을 이행함으로서 미국 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비핵화 대화 회의론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유해 발굴 및 송환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게 되면 유해 송환은 북한에게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서 대화의 판을 유지하는 꽃놀이패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실제로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따르면 1996~2005년 북한과 미국이 공동 진행한 유해발굴 작업을 위해 미국은 2800만달러(약 318억원)를 북한에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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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송환을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보고 있다. 연합뉴스


◆유해송환에 목마른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해송환 문제를 정치적으로 띄우며 여론전을 벌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유해송환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전사자 영웅들의 유해를 돌려받았다”며 “사실 이미 오늘 200구의 유해가 송환됐다(have been sent back)”고 밝힐 정도로 이 문제를 중시하며 여론의 관심을 모았다. 송환이 실제로 이뤄진 27일에는 트위터를 통해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취해진) 이번 조치는 많은 (미군) 가족에게 위대한 순간이 될 것이다. 김정은(국무위원장)에게 고맙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 6.25 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이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미국에서는 제대군인과 전사자에 대한 예우가 각별하다. 외국에서 전사한 장병을 고향으로 데려오는 일은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인도적 사안이다. 정치권과 행정부에서는 이를 통해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면서 다인종국가인 미국의 단결에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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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산기지에 도착한 6.25 전쟁 전사자 유해 55구를 실은 차량이 의장대를 앞세운 채 오산기지 내 도로를 지나가고 있다. 길 양옆에는 미군 장병들이 도열해 거수경례를 하며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미국 국방부 제공


북미정상회담에서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과 발굴이 포함된 것도 미국 사회의 기류를 반영한 것이라는 평가다. 해외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 발굴과 신원 확인을 담당하는 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6.25 전쟁 미군 전사자는 5300여명이다. 미국은 1990~1994년 북한에서 400구의 유해를 인도받았고 1996~2005년 북한과의 공동발굴작업을 통해 229구를 송환했다. 2007년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유해 6구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옮긴 것이 마지막 유해 송환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6.25 전쟁에서 전사해 북한 지역에 묻힌 미군 장병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 6.25 전쟁에서 전사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장병들을 기다리던 유족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미정상회담 직후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발굴과 송환을 북한측에 제안한 이유로 고령인 유족들의 입장을 거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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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6.25 전쟁 전사자 유해와 유품들. 육군 제공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1951년 1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 지역에서 사망한 스티븐 얼타모 육군 소령의 유해가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1996~2005년 북한 평안남도 운산에서 진행된 유해발굴작업에서 수습돼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 유해를 인도받은 얼타모 소령의 딸 케롤 엘킨(76)은 “오래 전 해외에서 사망해 소재조차 모르는 미군의 유해를 잊지 않고 찾아내 송환해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미국이 자랑스럽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북한 비핵화가 단기간 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유해 송환은 북미 대화 회의론을 차단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지지를 높일 수 있는 정치적 이벤트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미군 수송기가 북한에 도착해 유해를 싣고 미국으로 돌아가 성조기에 싸인 유해를 미국 본토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북한과 미국이 6.25 전쟁의 앙금을 씻어내고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할 수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 의회와 언론은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6.25 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을 인도주의적 조치로 규정하면 북미 대화 과정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다. 특히 유해 송환으로 북한의 북미정상회담 합의 사항 이행의지를 확인함으로서 비핵화 및 종전선언 협상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전환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 유해 송환 이후 북미 대화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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