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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피 튀기는’ 서바이벌 총질, 게임이라 다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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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나·배그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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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개봉한 일본영화 ‘배틀로얄’은 무인도에서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여야하는 상황에 던져진 중학생들의 이야기다. 영국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외쳤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잔혹버전’이었다. 영화 배틀로얄은 이후 게임 산업에 큰 영감을 주었고, 지난해 ‘배틀그라운드’와 ‘포트나이트’라는 게임이 탄생하는 밑천이 되었다. 영화는, 잔인했지만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임은,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지난 15일 열린 러시아월드컵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결승전. 전반 38분 페널티킥골을 넣은 프랑스 앙투안 그리즈만은 오른손으로 알파벳 엘(L) 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왼손은 가랑이 사이로 내린 뒤 양 다리를 번갈아 들어올리는 춤을 췄다. 이른바 ‘테이크 더 엘(Take the L=Take the Loss) 댄스. 온라인게임 ‘포트나이트: 배틀로얄(이하 포트나이트)에 등장하는 춤이었다. 게임의 광팬으로 알려진 그리즈만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도 골을 넣은 뒤 같은 춤을 췄다. 영국 매체 <텔레그래프>는 “역겨운(disgusting) 댄스 세러머니를 선보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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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8일, 영국 언론들은 남서부 데번주의 한 초등학교가 포트나이트에 등장하는 춤인 ‘플로스(floss) 댄스’를 금지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플로스 댄스는 다리 사이에 마치 치실(floss)질을 하는 것처럼 팔과 엉덩이를 움직이는 춤으로, 인스타그램 스타인 미국의 10대 소년 러셀 호닝이 지난해 5월 가수 케이티 페리의 공연에서 선보여 화제가 됐다. 이후 게임 포트나이트에서 ‘이모트 댄스’(게임 캐릭터가 감정표현을 할 때 추는 춤)로 다시 등장했는데, ‘테이크 더 엘’ 댄스처럼 게임 속 상대방을 죽이거나 기절시킨 뒤 추는 춤이었다. 이 춤을 “실제로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을 겁박할 때 추고 있다”는 게 학교장이 춤을 금지시킨 이유였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선 한 연예인이 지상파 방송에 나와 “어제 헤드샷 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그가 “헤드샷 했다”는 건 온라인게임 ‘플레이어언노운즈 배틀그라운드(이하 배틀그라운드)’에서 총으로 상대 이용자의 머리를 명중시켜 사살했다는 말이다. 유튜브에서 ‘배틀그라운드 영상’으로 검색하면 개그맨 유상무 등 유명 연예인들이 ‘광탈’(빛의 속도로 탈락. 게임 속 캐릭터가 빠르게 사망한다는 뜻)한 뒤 흥분하는 영상부터, 차를 몰아 게임 속 캐릭터 100명을 치어 죽이는 실험 영상까지 ‘기발한’ 콘텐츠들이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포나, “피가 없어 걱정 덜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포트나이트는 2017년 9월 미국의 게임 제작사 에픽게임즈가 출시한 온라인 슈팅게임(총이나 무기를 발사해 적이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게임)이다. 애초 그해 7월에 ‘포트나이트: 세이브 더 월드’라는, 최대 4명의 이용자들이 협력해 요새를 짓고 좀비와 맞서 싸우는 형식의 ‘원작’이 출시됐다가 두 달 뒤 이용자들과 이용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배틀로얄’ 모드가 추가됐다. 이후 배틀로얄 모드가 큰 인기를 얻는 대신 세이브 월드 모드의 인기는 시들해지면서 사실상 두 개의 게임으로 갈라졌다. 이후 ‘포트나이트’는 사실상 포트나이트: 배틀로얄을 지칭하게 됐다.

게임은 100명의 사용자들이 고립된 섬에 낙하한 뒤 자원과 무기를 습득해 서로 싸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캐릭터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자원과 무기를 습득하는 과정을, 농사에 빗대 ‘파밍’(farming)이라고 한다. 최후의 1인이 승자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파밍을 해서 상대방을 없애는 게 관건이다. 게임 초반 파밍 속도가 느린 초보자들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장을 한 숙련된 상대방에게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간발의 차이로 게임 속 캐릭터의 운명이 갈릴 수 있어 긴장감이 넘친다.

포트나이트는 출시 100일 만에 누적 이용자 4000만명을 넘었고 동시 접속자 수 175만명을 돌파했다. 지난달 제조사인 에픽게임즈가 밝힌 누적 이용자는 1억2500만명에 이른다. 주로 유럽과 북미, 호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5월 ‘포트나이트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피가 튀지 않고 밝고 화려한 게임의 색감이 부모들의 걱정을 덜어줬다”고 분석했다. 상대방을 죽이고 살아남아야 우승을 할 수 있는 ‘폭력성’을 만화 같은 캐릭터와 배경으로 희석시켰다는 얘기다. ‘포트나이트는 ‘12살(이상) 이용가능’ 게임이다.

포트나이트 이용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이용된 주된 통로는 게임방송 플랫폼이다. 지난 3월엔 미국의 유명 래퍼 드레이크와 트레비스 스캇이 게임방송 플랫폼인 ‘트위치’의 한 채널에 출연해 채널 운영자와 포트나이트를 함께 했는데 방송을 본 시청자가 60만명에 달했다.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이자 프리미어리그 손흥민(토트넘 핫스퍼)의 팀 동료이기도 한 델레 알리도 지난 4월 트위치를 통해 자신의 포트나이트 게임을 생중계했다. 게임을 경험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유럽 프로축구, 미국 미식축구 선수들의 세리머니에도 포트나이트 댄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게임이 무서운 속도로 퍼지자 걱정하는 목소리도 등장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주의 몇몇 초등학교들은 지난 6월 학부모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들이 포트나이트를 하면서 친구를 따돌리거나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저학년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 6월 ‘게임 장애’(gaming disorder)를 ‘일상보다 게임을 우선시하고 개인, 가족, 직업 등의 영역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지속하려는 중독성 행동장애’로 규정하고, 질병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배그, 총기반동에 발소리까지 ‘디테일’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인기인 포트나이트가 유독 기를 펴지 못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포트나이트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최후의 1인을 가리는 게임 장르를 업계에선 ‘배틀로얄’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포트나이트보다 더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배틀로얄 게임이 유행 중이다. 국내 게임 제조사인 블루홀의 자회사 펍지주식회사에서 만든 ‘플레이어언노운즈 배틀그라운드(이하 배틀그라운드)’다.

배틀그라운드는 2017년 3월 글로벌 게임유통 온라인 플랫폼인 스팀에서 먼저 출시됐다. 무료인 포트나이트와 달리 유료(3만3000원)로 발매됐지만 출시 13주 만에 매출이 1억달러를 넘었다. 제조사가 밝힌 지난 6월20일 기준 누적 판매량은 5000만장 이상이었다. 일일 사용자수(DAU)가 8700만명에 이른다. △100명의 사용자들이 1인 또는 2인, 4인으로 팀을 이뤄 최후의 생존자가 승리하는 방식 △무기와 보호장비 등을 파밍하는 게임 전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캐릭터에게 피해를 주는 ‘자기장’이 좁아지고, 자기장이 없는 ‘안전지역’이 줄어들면서 플레이어 간의 전투를 유도하는 방식 등은 ‘포나(포트나이트)’와 ‘배그(배틀그라운드)’의 공통적 특징이다.

포트나이트가 만화 같다면 배틀그라운드는 영화에 가깝다. 총을 맞은 캐릭터의 몸에선 피가 튄다. 게임 속엔 수많은 총들이 등장하는데 총마다 반동이나 총탄이 튀는 방향 등이 다르다. 이를 제어하는 부속품들을 적절하게 ‘파밍’하는 게 중요하다. 총을 쏠 때 숨을 참거나 반동을 감소시키는 키보드와 마우스 조작이 필요할 정도로 ‘디테일’이 섬세하다. 게임 속 상대방과 전투를 치를 땐 시각 못지않게 청각도 중요하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할 때, 적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발생하는 소리들에 집중하지 않으면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실제 전투에 가까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 배틀그라운드의 가장 큰 매력이다.

북미·유럽 ‘포트나이트’ 열풍
사람 죽이고 추는 ‘모욕춤’ 유행
만화적 캐릭터와 배경으로
폭력성 희석, 부모들 우려 덜어


한국선 ‘배틀 그라운드’ 유행
혈흔·총기 반동 등 사실적 표현
‘청소년 불가’에도 10대들에 인기
‘게임 속 100명 죽여보니‘ 실험도


폭력적 게임 유해성 의견 분분
“부모가 함께 해보는 게 바람직”


폭력적 게임의 부정적 영향을 연구한 논문들은 게임의 ‘실재감’을 이용자들의 흥분 상태를 자극하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실재감을 높이는 요소로 △혈흔 △시점 △음향 △인물과 무기의 사실적 묘사 △모니터에 제공되는 전투 관련 정보 등이 제시되는데, 배틀그라운드는 이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 실재감은 이용자들의 몰입이나 재미, 즐거움 같은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에, 게임 인기를 높이고 확산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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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그라운드는 지난해 11월 카카오게임즈를 통해 한국에 정식 발매됐다. ‘사실적인 무기 표현과 과도한 혈흔 표현’ 탓에 청소년이용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지난 1월 혈흔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등 내용을 수정해 15살 이용가 등급 버전을 추가했다. 배틀그라운드는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구동하기 위해 필요한 중앙처리장치(CPU)나 메모리, 그래픽 카드 등 시스템 요구 사양이 높은 편이라 주로 피시방에서 하게 된다. 부모의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이용해 성인계정을 개설하고 피시방에서 게임에 로그인하는 학생들까지 일일이 제한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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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폭력성의 관계 논란

포트나이트나 배틀그라운드 같은 게임들이 이용자들의 공격성을 강화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게임은 이용자의 적극적 참여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보다 폭력성이나 공격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클 것이라는 주장이 한편에 있지만, 반드시 부정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연구도 있다. 뉴욕주립대 버팔로 캠퍼스 매튜 그리자드 교수 등은 201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가상 환경에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면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되고 이 높아진 민감성으로 인해 (실생활에서) 더 도덕적으로 엄격한 판단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최근엔 단순히 게임의 유무, 게임 시간의 길고 짧음 같은 요인에서 나아가 혈흔이나 음향 등 게임 구성 요소를 세분화해 그 영향을 파악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5년에 쓰여진 ’폭력적 비디오게임의 사용자 경험과 공격 행동성에 대한 연구’ 논문(윤주성·노기영)을 보면 “폭력적인 게임이라도 게임 속 시·청각적 자극이 강렬하거나 게임 자체가 즐거울수록 게임에 더 몰입하게 되고, 게임 속 캐릭터를 이용해 적을 처치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스릴감과 즐거움이 더 커진다”며 “결국 이런 과정이 공격적 행동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게임과 디지털 문화를 강의하는 마르커스 카터 박사는 지난달 20일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포트나이트의 유해성에 대한 언론의 우려가 과도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아이들은 부모 세대들과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그 차이가 부모들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며 “온라인 게임이 다른 미디어들과 크게 다를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걱정하는 부모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일은 아이들과 게임을 함께 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배틀그라운드를 놓고 아이와 날마다 다툼을 벌이고 있는 부모라면 새겨들을 만한 말일 수 있다.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참고

FPS 게임의 혈흔과 전투정보가 적대감 및 공격행위에 미치는 영향(2014, 육은희·이숙정)

폭력적 비디오게임의 사용자 경험과 공격행동성에 대한 연구(2015, 윤주성·노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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