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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징용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고 판사는 해외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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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양승태 대법원의 ‘강제징용 재판거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

일 전범기업에 손해배상 청구

2012년 대법원이 손들어줬지만

박근혜 정부서 이후 절차 ‘스톱’

아직까지도 최종 판결 안 나와

외교부 ‘일본과 관계 악화’ 우려

법원행정처 ‘해외근무’ 자리 위해

징용 재판 연기로 협조한 정황

뉴욕·제네바 등에 판사 파견 시작

피해자 9명 중 7명은 그 사이 사망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이 사법부의 존립 기반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된 사건 중 하나가 강제징용 배상 재판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재판을 미루고 과정을 뒤틀어서, 고령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내 한을 풀지 못하게 했다. 재판 연기로 얻고자 했던 것은 겨우 ‘판사의 해외 근무’였던 것으로 현재까지 파악됐다. 이 과정을 법원행정처 문건 등을 통해 추적해본다.



“2년간 근무하면 기술자 자격을 딸 수 있고, 조선에 돌아오면 기술자로 대우받는다.”

1943년 평양에서 이발사로 일하던 여운택(1923~2013년)씨는 일본제철 오사카공장 공원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공장’이라던 곳은 가서 보니 노역장과 다름없었다. 숙소는 각목 창살로 둘러싸여 있었다. 용광로에 무릎을 태우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을 맞아 군수물을 보급하던 전범기업에 ‘강제동원’된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5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1997년, 여씨는 일본에서 먼저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최고재판소에서 끝내 패소했다.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이 소송을 낼 권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5억 달러가 발목을 잡았다.

2005년, 여씨는 한국 법원에 다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2심에서 연거푸 졌지만, 2012년 대법원에서 처음 승소했다. 한국 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였다. “죽을 곳 가서 일한 거 못 받게 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법원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씨는 밟게 웃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고법은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신일철주금이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신일철주금이 불복해 재상고하며, 사건은 다시 대법원에 접수됐다. 순리대로라면 심리불속행(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것)되는 게 마땅한 사건이었다. 심리불속행 ‘마지노선’은 2013년 12월이었다.

하지만 재판이 한없이 지연되면서, 여씨는 끝내 1억원을 받지 못하고 그해 연말 숨졌다. 뒤따라 다른 피해자들도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낸 9명 가운데 7명이 숨진 지금까지도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여씨의 ‘감사 인사’는 배신당한 유언으로 남았다.

5년간 대법원에서 잠들어 있던 이 사건은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 의혹과 함께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법원행정처가 외교부로부터 배상 판결을 확정하지 말아달라는 민원을 접수한 뒤 강제징용 재판 결론을 의도적으로 미룬 정황이 드러났다. 법원이 그 대가로 얻은 것은 해외 공관에 파견할 법관 자리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검찰은 지난 2일 외교부 기획조정실 등 인사 담당 부서를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고삐를 죄고 있다. 그들의 ‘거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됐을까?

양승태 대법원의 ‘셀프부정’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된다.”

“청구권협정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미쓰비시·신일철주금 등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2012년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이인복?안대희?박병대)의 판결 요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일본 법원이 피해자들이 배상을 요구할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는 취지다.

이 논리는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2012년 9월) 및 박근혜 대통령 취임(2013년 1월)과 동시에 부정된다.

“외교부 내부 입장. 2012년 판결 직후 일본 공사가 방문해 확정되지 않도록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정부는 판결 확정 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다. 대법원의 신중 처리를 요망한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이하 행정처)가 2013~14년 작성한 문건에 나오는 대목이다. 외교부의 ‘민원’은 박정희 정권의 유산을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노골적으로 변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했다는 것을 전제로 판결을 파기해달라는 ‘비공식’ 입장도 행정처에 전달한다. 한국 정부가 한 번도 천명한 적이 없는 입장이다.

소송 당사자도 아닌 외교부의 ‘입장 전달’은 그 자체로 부적절하고 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행정처는 이를 뿌리치지 않았다. 외려 판결을 뒤집을 방안을 조직적으로 검토한다.

“1안. 심리 불속행한다. 심리불속행 기간 내인 2013년 12월 이전 판결한다. 이 경우 외교부와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 외교부는 국제기구 내지 법관 파견에서 중요하다. 2안. 외교부와 관계를 고려해 신중히 판단할 필요.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기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3년 9월 행정처 사법정책실 문건)

정책실은 ‘2안’을 택한 뒤, 이를 정당화할 방안까지 꼼꼼히 제시한다.

“외교부에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절차적 만족감을 준다. ‘간접적인 방안’-피고 변호사(김앤장 로펌)를 통해 외교부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하게 하고, 국외송달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심리불속행(2013년 12월) 기간을 넘긴다. 외교부 입장을 서면으로 재판에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다.” 이 ‘노력’은 현실화된다. 2015년 1월, 대법원은 ‘민사소송규칙’을 개정해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공익 관련 사항에 관해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은 이들에게 의견서를 제출하게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추가한다. ‘상고심 충실화’라는 이유였지만, 굳이 대법원 재판에서 정부 의견을 듣겠다고 나선 것이다.

‘상고심 충실화’라는 명목은 허울에 불과했다는 건 이후 행정처 문건들에서도 확인된다.

“신일철주금 사건에서 외교부 입장을 반영했다.” (2015년 9월, 사법지원실 문건)

“올해 초 대법원 규칙 개정해 상고사건에서 참고인 의견서 제출제도 도입→ 정부가 사건 분류 단계에서 공공의 이익과 관련된 사건을 대법원 심판사건으로 정해 달라는 공식적 의견 개진 가능” (2015년 7월, 기획조정실 문건)

실제 2016년 김앤장은 징용소송에서 잇달아 외교부 의견서를 받아 법원에 낸다.

이 의견서에는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재산을 압류할 경우 양국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 “법리적으로 한국이 이기기 어려운 사안”, “한국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로 인식돼 도덕적 우월성까지 잃게 될 것”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한 판사는 “어느 나라 외교부가 쓴 건지 알 수 없는 논리”라고 말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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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라인 이익’ 위해 총집결

양승태 행정처는 왜 외교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을까. 행정처 문건들에 몇 가지 단서가 남아 있다.

“2010년 중단된 주미 대사관,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파견을 되찾아야 한다”, “(김기춘 비서실장, 이정현 홍보수석 등) 청와대 인사위원회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2012~13년 행정처 문건)

“BH(청와대) 협조요청사항. 재외공관 법관 파견에 적극 협조 외교부의 긍정적·전향적 태도 유도” (2014년 12월 기획조정실 문건) 대법원은 사법교류 등 명목으로 2006년부터 ‘사법협력관’ 제도를 만들어 미국·오스트리아 등 대사관에 판사를 파견해왔지만,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부터 중단됐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행정처는 외교부를 ‘연결고리’로 파견 자리를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 2013년부터 주유엔 대표부와 주제네바 대표부, 네덜란드 대사관 등에 파견이 재개됐다.

해외파견은 3000여명의 판사 가운데 한 해 1~2명 안팎의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다. 선발성 인사라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백분 발휘된다. 실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협력관 5명 가운데 4명이 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다. 비정기적인 국제기구 재판관 등으로 해외근무의 범위를 넓혀 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을 맡으며 휴직한 정창호 재판관은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이고, 캄보디아 특별재판소의 백강진 재판관은 행정처 정보화심의관을 지냈다. 두 사람 모두 해외근무 중 차관급 혜택을 받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명목은 ‘사법교류’지만, 실제 그 혜택은 행정처 출신이 독점합니다. 특정 ‘사법행정라인’을 위한 자리인 거죠. 행정처 출신으로 대법원장 눈에 든 이들을 ‘포상’하고, 고법부장으로도 승진시켜 기득권을 공고화하는 구조입니다. 해외에서 재판 업무로 복귀한 뒤에도 ‘사법행정라인’의 호감을 사려 할 수밖에 없겠죠.”(서울지역의 한 판사)

대법원은 지난달 27일 징용사건을 대법관 13명이 모두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전합)에서 다시 심리하겠다고 밝혔다. 이례적으로 사건 쟁점을 ‘친절히’ 설명한 보도자료까지 뿌려 전합 회부를 홍보했다. 통상 4명의 대법관이 속한 소부에서 만장일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판례 변경이 필요한 사건이 전합에 간다. ‘강제징용’ 사건은 2012년 대법원 1부가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뒤, 같은 취지의 하급심 판단을 거쳐 대법원에 5년째 계류된 경우다. 대법원이 소부에서 한 차례 판단 내린 같은 사건을 대법원 소부가 다시 넘겨받은 뒤 5년 만에 전합에 올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법조계 인사들은 “헌정 사상 최초일 것”이라고 입 모은다.

시점도 석연치 않다. 2015년 9월부터 “관련 사건을 통일적이고 모순 없이 처리하기 위해 심층 검토 중”이었다가 3년 만에 갑자기 ‘전합 회부’로 ‘상태 변경’됐다.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진 시점이자, 2012년 배상 판결을 내렸던 이인복 대법관(2016년 9월 퇴임)과 박병대 대법관(2017년 6월 퇴임)이 모두 퇴임한 이후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노골적인 자기모순을 피하기 위해 두 대법관 퇴임 때까지 기다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게다가 전합 회부는 양승태 행정처가 제시한 판결 ‘파기 시나리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법원에 계류 중인 강제징용 사건 시나리오. 1) 재상고 기각. 2) 새로운 쟁점으로 파기 3) 조정 회부 4) 사법자제론 5) 전원합의체 판단” (2014년 11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판결 관련 보고’ 기획조정실 문건)

한 부장판사는 “2012년 판결은 법리적으로 명쾌하다. 지난 5년간 별다른 사정 변경도 없었다. ‘외교관계 악화 우려’ 등은 ‘사정 변경’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시민들은 아직도 ‘재판거래’가 진행 중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서울중앙지법은 2015년 12월28일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 이틀 뒤 조정 불성립을 선언한다. 기획조정실은 이듬해 1월2일 ‘위안부’ 소송을 각하하거나 기각해야 한다고 계획한다. 이 재판은 지금까지도 1심에 계류돼 있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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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에 의한 사법농단

‘재판권 독립’은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선고가 나올 때까지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재판 절차가 뒤틀리면 결과는 당연히 왜곡되기 마련이다. 행정처는 징용 소송 절차에 개입하려 계획했고, 실제 대법원 규칙 개정과 5년간의 연기로 계획은 실현됐다. 대법원 규칙은 대법관 회의를 거친 뒤에 비로소 개정될 수 있다. 징용소송에서, 행정처와 재판부는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 자체조사단은 지난 5월 징용·‘위안부’ 관련 행정처 문건을 보고도 작성자를 조사하지 않았다. ‘재판 결과가 안 바뀌었으니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단정한 탓이다.

“행정처에 의한 사법농단이 아니라, 사법부에 의한 사법농단이다.”(한 판사)

사법부는 시간도 왜곡했다. 시간은 법원이 가진 가장 큰 권력 중 하나다. 법원은 ‘제때 소송을 내지 않았다’(소멸시효)는 이유로 청구를 가차 없이 기각할 수 있다. 하지만 판결에는 데드라인이 없다. 9명의 ‘징용’ 피해자 중 소장에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2명뿐이다. 대법원은 판결을 미룸으로써 피해자들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 소장보다 더 무겁고 두꺼운 죽음의 기록이 쌓였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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