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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동성애 금지 시대’, 영국 신사들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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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영국 드라마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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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영국 자유당 국회의원 제러미 소프(휴 그랜트)는 옛 연인의 편지 한 통을 받는다. 4년 전 처음 만나 한눈에 반해 불같은 사랑을 나눴던 동성 연인 노먼 스콧(벤 휘쇼)이 보낸 편지였다. 아직 동성애차별법이 엄존하던 시절이었다. 소프는 스콧의 연락을 무시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소프의 정치 경력을 단번에 끝낼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된다. 보수당과 노동당의 인기가 시들해진 틈을 타 자유당의 부활을 이끌고 차기 총리까지 노리던 소프는 아예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지난 5월 영국 <비비시>(BBC)가 방영한 3부작 드라마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원제 ‘A Very English Scandal’)은 영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 중 하나를 소재로 한다. 제러미 소프가 동성애자임을 감추기 위해 옛 연인 노먼 스콧을 청부살해 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제러미 소프가 누구인가. 유명 정치인들을 연이어 배출한 명문가 출신, 옥스퍼드대학 졸업 등 화려한 배경을 지니고 군소정당인 자유당에서 빠르게 정치적 입지를 다진 스타 정치인이자, 차기 총리감이라 칭송받던 거물이었다. 살인은 미수로 그치고 재판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지만, 승승장구하던 소프의 정치생명은 이 스캔들로 완전히 끝이 난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은 제러미 소프 스캔들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의 모순을 저격한다. 제러미 소프를 향한 대중적 비난의 핵심이 깨끗하고 개혁적인 공적 이미지와 사적인 추문과의 괴리에 있었다면, 진보와 성장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영국 사회의 이중성 역시 그 못지않게 추악한 스캔들이라는 비판의식이다.

더 나아가 소프 스캔들을 동시대 영국 사회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사용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롭다. 극 중 소프의 의회 연설 장면들이 단적인 사례다. “총리가 이민제한 정책을 강행한다면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후퇴할 것이고 결국 극우파가 득세할 것입니다. 영연방의 모든 시민은 이 나라에 안전하게 입국할 자유가 있습니다”라는 소프의 첫 연설 장면은 엄청난 환호를 이끌어낸다. 두번째 연설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영국의 유럽공동시장 가입은 엄청난 기회와 성장을 의미합니다. 유럽은 모든 영국 시민과 미래 세대에게 풍요를 안겨줄 거대한 새 지평의 상징이 될 겁니다.” 엄격한 이민 정책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후유증으로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는 영국의 현주소에 대한 자조가 엿보인다.

이 이야기를 영화 <더 퀸> <빅토리아 앤드 압둘>의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 <닥터 후> 시리즈의 작가 러셀 티 데이비스 등 영국의 국가대표 격 제작진이 뭉쳐 만들어낸 것도 재밌는 지점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속의 이상적인 영국 총리 이미지로 각인된 휴 그랜트가 추락한 차기 총리 후보를 연기한 것은 그 흥미로운 협연에 정점을 찍는다. 드라마를 향한 평단의 호평에는 다 이유가 있다.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은 지난 3일부터 국내에서도 방영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근 연이은 정치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또 어떤 반향을 이끌어낼지 궁금해진다.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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