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행복에도 최저한도가 있나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드라마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요시쓰네 에미루(요시오카 리호)는 현재 공무원이다. 이제 막 임명장을 받은 신입이지만, 젊은 나이에 꿈보다 안정을 택했다는 생각에 큰 의욕은 없다. 구청 생활지원과에서 일하게 된 것도 부담스럽다. 동기들이 생활보장 수급자들에 대한 편견을 잔뜩 늘어놓으며 겁을 줘서다. 설상가상으로 근무 첫날 제일 먼저 받은 상담 전화는 한 수급자의 자살 예고다.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답은 ‘원래 유명한 사람’이니 적당히 대처하라는 담담한 말뿐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에미루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일본 케이티브이의 3분기 드라마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이 최근 국내에서도 방영을 시작했다. 제목은 일본 헌법 제25조 가운데 “모든 국민이 가지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누릴 권리”에서 따왔다. 생활보장 수급자들과 구청 사회복지과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얼핏 보면 국가 정책 홍보드라마 같은데 인기 만화가 원작이다. 근로감독관을 주인공으로 한 <단다린 노동 기준 감독관>이나 노인요양 제도를 다룬 <마지막 거처>를 볼 때도 느낀 거지만, 일본에선 이런 사회적 소재가 지속적으로 드라마화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다만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은 정통 사회고발극이라기보다는 사회 초년생의 성장드라마 겸 휴먼 직장 드라마 안에 사회적 문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이다. 주인공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읽는 사회복지 서적에서 일본 남성 독신 가구의 약 40%가 빈곤층이라는 사회적 통계가 슬쩍 끼어드는 식이다. 외근 때마다 사용하는 구청의 낡은 자전거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복지과로는 돈이 거의 안 온다”는 대사로 복지에 대한 정부의 인식을 에둘러 비판하기도 한다.

생활보장 수급자들을 향한 사회적 혐오가 일상에서 스치듯 드러나는 장면들은 특히 섬뜩하다. 일례로 첫 회에서 생활보장 서적을 읽는 에미루를 본 단골 식당 직원이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우리 가게에도 그런 사람들 많이 와. 와서는 꼭 비싼 거 시켜 먹는다니까. 태평하기도 하지.” 헌법에도 명시된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누릴 권리”에서 ‘최저한도’에만 집중한 나머지 수급자들이 식당에서 외식 한번 하는 것조차 고깝게 보는 이들이 실제로도 많다. 국내에서도 복지 혜택 관련 기사 아래 어김없이 따라붙는 댓글들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다.

생활지원과에 오기 전까지 에미루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직장 선배 한다 아키노부(이우라 아라타)는 이러한 혐오에 대해 단순하고도 현명한 조언을 들려준다. 사회복지 공무원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용자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상상하는” 힘이 필요하다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퇴화한, 공감과 존중의 능력이다. 스스로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하는 에미루조차 평범의 기준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이란 말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한 에미루의 고민은,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닐까.

김선영 티브이평론가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