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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격동의 한가운데, 평범한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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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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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중국드라마 <전장사>

1938년 중일전쟁 초기, 중국 수도 난징을 함락한 일본의 공격이 갈수록 거세지자 수많은 피난민이 중남부의 창사까지 밀려온다. 수용 인원의 한계를 초월한 도시에서는 생필품마저 구하기 어렵게 되고, 민간에서는 가족 한 명이라도 더 피신시키기 위해 어린 소녀들까지 서둘러 결혼시키는 이른바 ‘전쟁 혼인’이 유행한다. 창사의 터줏대감 후씨 집안 손녀딸 샹샹(양쯔)도 강제 결혼할 처지에 놓인다. 상대는 정부 고관의 자제 구칭밍(훠젠화), 창사에 주둔 중인 군인이었다. 강제결혼을 거부하는 샹샹과 군인의 의무를 앞세우는 칭밍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상대를 극구 밀어낸다. 그사이, 전쟁은 점점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후씨 일가에도 크나큰 시련이 닥친다.

2014년 중국 상하이 티브이에서 방영한 32부작 드라마 <전장사>(战长沙)는 중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격변의 역사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얼핏 보면 중국 드라마의 주류 장르 중 하나인 전형적인 항일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 대부분이 흔히 그러하듯 이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생생하게 조명한 수작이다. 격동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 후씨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항일 정신, 민족주의, 반전의식 등과 같은 거대 이념과 개개인의 꿈, 사랑, 가족애 등의 작고 다양한 목소리들을 균형 있게 담아냈다.

주인공 후씨 일가는 증조부모부터 어린 증손자까지 사대가 함께 살아가는 전통적인 대가족이다. 그저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돌보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가족의 운명은 전쟁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뀐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들 중 누군가는 전쟁 한복판에 뛰어들어 총검을 들고, 누군가는 또 다른 전선에서 생명을 구하며, 누군가는 시대의 변화를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볼 것이다. 훗날 역사에 기록되는 이들은 전쟁에 공을 세운 영웅들이겠지만, 드라마는 결국 치열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한 이들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라 말한다.

특히 손주 세대인 샹샹과 동반자 칭밍이 엮어가는 사랑과 성장의 드라마는 이 작품의 핵심 주제를 잘 보여준다. 사고뭉치 명랑소녀였다가 항일의식에 눈뜨며 성숙해지는 샹샹과 한결같이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칭밍은 영웅 서사에 딱 들어맞는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평범한 꿈을 지닌 인물들이다. 샹샹의 역할이 뒤로 갈수록 제한돼 아쉬움이 크지만, 공적 소신과 사적 욕망에 위계를 두지 않는 드라마의 태도는 꽤 인상적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 피해를 입은 비슷한 근대사를 지녔으면서도 이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극히 드문 우리나라의 시청자로서는 이런 작품의 존재 자체가 부럽기만 하다.

김선영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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