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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양승태 ‘재판 지연’…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국적 포기를 시도했던 이유 [더(The)친절한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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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친절한 기자들]

1965년 체결된 한·일 협정의 그늘서 벗어나려

2003년 청와대 앞에서 한국 국적을 던졌다

한국인이라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나홀로 외로운 법적 싸움에 무관심했던 정부

2004년 특별법 제정하고 진상 조사 나섰지만

대법원 계류사건 지연하며 그들을 두 번 울렸다


한겨레

1965년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현수막을 들고 가두 행진하는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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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청춘의 문턱에 올라선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사내였다 . 식민지에 태어났다는 숙명 , 자신의 악운 , 군국주의의 강권 , 강제노동에 의한 자유의 박탈 , 이런 압박들은 나의 몸뚱이를 짓이기고 있었다 . 그것은 나 혼자에 대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 몇십만 징용인들이 겪고 있는 똑같은 운명이었다 . 나는 개 , 돼지만도 못한 이런 비인도적 처우에 대해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 이놈들아 ,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 어쨌다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와 고생을 시키느냐 . 그리고 내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작정이냐 . 나라를 위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전쟁의 미치광이들이다 .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입술을 적셨다 . 짜고 미지근한 액체를 소매를 끌어당겨 닦았다.” (<아버지가 건넌 바다 >, 이흥섭, 1990년 )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한국인을 강제 연행하여 노무자나 전선의 총알받이로 썼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혹사를 당했고 전후에도 상당수가 일본 현지에 남아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 <아버지가 건넌 바다>는 1944년 5월 황해도 곡산에서 밭일을 하다가 징용되어 현해탄을 건넜던 광산 노동자 이흥섭씨의 체험 수기다. 당시 30대 딸은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 적었다. 이 책은 이흥섭씨가 후쿠오카 비행장 공사판에서 8.15 해방을 맞는 것으로 끝난다.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방송을 듣고 이흥섭은 외친다. “나를 여기까지 끌어다 놓고 이제 어찌할 작정이냐.”

6년이 지나는 동안 7명이 숨졌다

해방 이후 67년이 지난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은 일본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양승태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재판을 지연시켰다는 ‘재판 거래’ 정황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강제징용 관련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된 상고심 중에 2012년 당시 대법원 판단을 받았다가 일본 기업의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재상고심은 2건이다. 대법원 최종 선고를 미루기 위해 외교부는 2016년 11월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대외신인도가 손상될 것”이라는 의견서를 제출한다.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된 6년 동안 두 사건의 원고 9명 중 7명은 숨졌다.

일제에 의해 현해탄을 건넌 그들, 또는 국내에서 강제 징용된 희생자들의 어그러진 청춘을 이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방기가 비단 최근 몇 년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에 비해 주목도는 낮지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강제징용은 민족적 수난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데 이어 이듬해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을 발령해 조선인을 연행할 수 있는 권한을 기업에 허가했다.

1939년부터 광복이 이뤄진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인원에 관한 기록은 단체마다 편차가 크다. 강제 동원 문제를 일본에서 처음 공론화한 재일동포 박경식은 1965년 발간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서 국내외 600만명으로 추정했고, 일본 민간단체인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은 1974년 조선인 강제동원 숫자가 1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연인원 기준으로 780만명으로 추산한다. 일제의 자료 인멸 등으로 인해 편차는 크지만 6년간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600만~700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600만명임을 감안하면 약 삼분의 일에 이를 만큼 전방위적이다.

해방 이후 국가는 희생자 조사를 시작하지만

한국 정부는 1949년 인구 총조사를 실시하면서 일제 징용, 징병, 미귀환, 사망자 등을 조사했다. 귀환자들도 국회와 정부에 징용, 징병에 의한 미수금과 미귀환 유골 봉환 등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런 요구를 수용하면서 한·일청구권 협정 준비를 해나갔다. 1952년 이승만 정권은 피징용자 사망 및 부상자 조사를 한다. 장면 정권은 1960년, 청구권 8항목을 정하여 일본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는 미군연합사령부가 1950년 일본 기업으로부터 보고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피징용자 미수금을 2억3700만엔으로 추정했다. 현재 가치로는 수십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징병 , 징용자 유가족 일본 정부에 배상 요구

징병 , 지원병 , 징용으로 희생된 동포들의 유가족들이 단결하야 일본 정부에 배상 요구 운동을 전개하게 되어 . 유가족 동인을 조직하고 활동 중인데 유가족은 시내 서대문로 일가 오팔 번지동회에 연락을 요망하고 있다 .

(<동아일보 > 1947년 10월 4일 )

한겨레

지난 2015년 일본 하시마에 찾아온 관광객들의 모습. 강제 징용된 조선인에게는 지옥섬으로 악명 높았던 하시마는 이후 관광지로 변모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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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희생자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1965년 한일협정을 맺는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와 법인을 포함한 국민의 재산·권리·이익·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 (한일청구권 협정 제2조 제1항)

이 협정의 제3항은 “협정 서명일 이전에 발생한 사유로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고 돼 있다. 일본은 이 조항을 근거로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지금껏 주장한다. 한·일 협정 타결로 한국 정부는 1966년부터 10년 동안 무상공여(3억 달러), 유상자금(2억 달러), 민간차관(3억 달러) 형태로 청구권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정부는 국가 대 국가로 받은 보상금으로 1966년 2월19일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10년간 청구권 자금 집행 실적을 종합 정리하여 기록에 남겼다. 이 기록이 청구권자금 백서다. 백서를 보면, 포항제철 건설 프로젝트에 총 1억1948만 달러가 투자된다. 경부 고속도로, 소양강댐 건설도 일본 청구권 자금으로 진행됐다. 김장실 전 새누리당 의원이 2015년 9월 행정자치부로부터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 수혜기업 현황에 따르면 포스코, 외환은행, 한국전력, 코레일, 한국수자원공사, 케이티엔지 등 16개 공공기관과 기업에 유무상으로 들어간 대일 청구권 자금은 3억6485만 달러였다.

희생자들 대신 기업에 돈이 흘러들어 가자 피해자들의 원성이 심해졌다. 정부는 1974년 12월21일 ‘대일민간청구권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듬해 7월1일부터 2년간 일부 희생자에게 보상을 실시했다. 심사를 통과한 사망자 8910명에 대해 1인당 30만원씩 총 25억6560만원을 지급한 것이다.

2003년, 청와대에 국적 포기서를 던졌다

해방 이후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대일청구권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을 보였고, 한국 정부 또한 이 문제에 대해 늘상 미온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끌려간 노무자들은 대다수 사회 빈곤 계층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사회적 의제를 제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10년 넘게 그들은 법정 투쟁을 벌인다. 군인, 군속, 노무자, 군부, 정신대, 여성 근로 정신대 등 당시 희생자들은 자비를 들여가며 1992년 ‘광주 1000인 소송단’을 꾸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 결과는 패소였다.

표면적으로 잠잠한 것처럼 보였던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2003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8월13일에 또다시 터져 나온다. 그들은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국적을 던졌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추진위원회’가 모은 국적 포기서는 150여장. 국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1965년 한일 협정의 족쇄에서 풀려나겠다는 뜻이었다. 한국 국민이기에 오히려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국가는 이들의 국적 포기서를 받지 않으려 막아섰다. 청와대 면회실로 몰려간 그들을 경찰이 저지해 4시간 동안 승강이를 벌였다. 3명의 국적 포기서만 상징적으로 청와대 관계자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외교통상부 공직자의 발언도 이들에게 상처를 줬다. 당시 정상기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합의 의사록을 보면, 청구권 자금을 받을 때 명목 중 강제징용자 부분도 포함됐다. 우리 정부가 신문 공고를 통해 1975~77년 3년간 다 지불했다”면서 “(국적 포기 주장)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다. 순수하게 피해를 봐 했다는 분도 포함돼 있을 수 있지만 전혀 확인할 방법도 없고 일부 납득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는 발언으로 분노를 샀다. 당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특별법’은 국회 심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한·일 청구권 협정 문서 공개를 청구해도 정부가 거절해 희생자들이 절망하던 때였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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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특별법은 제정됐으나

국적 포기서 제출을 계기로 노무현 정부 들어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제정되고 위로금 지원 사업도 시작된다. 그러나 강제동원 노무자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빈약했다. 일본에 자료를 요구해야 하는데도 한국 정부는 일본을 압박하는 등의 협상이 부족했다. .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2004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2007년)이 폐지되면서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2010년 새로 제정된다. 이 법의 제정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 법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1965년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과 관련하여 국가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원함으로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 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법은 희생자를 국내 동원과 국외 동원으로 구분하고, 국외 동원에 한해 위로금 내지 의료비를 지원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이와 더불어 정부 진상 조사도 시작됐다.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 규명위원회’(2004년)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2008년)가 통합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 동원위)가 2010년 발족한다. 그러나 국무총리실 소속 강제 동원위마저 2015년 12월31일자로 폐지됐다. 2010년 한시적 기구로 출범해 6개월에서 1년 반마다 시한을 연장했는데 국회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되지 않은 것이다.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일본 지식인들이 위원회 상설화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국회에 냈다. 기업책임추궁재판전국네트워크, 나가노현강제노동조사네트워크 등 일본 식민지 지배에 비판적 태도를 지녀온 17개 단체와 히구치 유이치 고려박물관장, 오타 오사무 도시샤대 교수 등 전문가 30명이 2015년 11월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활동 근거인 특별법이 개정되지 않아 5년 만에 해산을 맞았다. 전 국민적 공분을 샀던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체결’ 사흘 뒤였다.

60여년 만의 승소마저 지연되다

해방 이후 60여년이 지나도록 이들이 손에 쥔 첫 승리는 한국 법원에서였다.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 때문에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및 임금지급 청구에서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 짧은 승리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일본 기업의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자 한국 정부가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하고 법관을 국외 공관에 파견하는 등 재판을 지연시켰다는 정황이 현재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 헌법은 국민에 대한 국가 책무를 이렇게 규정한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제10조) “타인의 범죄 행위로 인하여 생명 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제30조)

일제 치하에서 비롯된 그들의 계속되는 고통을 국가는 치유하기보다 지속해서 방관하고 회피했다.

한국 정부는 전 민족적 수난인 강제동원 문제에 있어서 늘상 희생자들의 요구에 떠밀려 움직였다. 희생자들이 아흔을 넘어 숨지도록 재판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사실상 훼방했다. 강제동원 희생자들은 일제 치하에서는 힘없는 국가에 의해 삶이 망가졌고, 이후에는 무책임한 국가에 의해 본연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국가가 지키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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