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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끝에서 풍차는 도보여행자를 기다린다.
여름의 길은 언제나 가혹하다. 걷는 이에게 뜨거운 햇살은 고행에 다름이 아니다. 어쩌면 여름의 창창한 햇살 입장에서야 그저 원래 그런 것을 어쩌란 말이냐고 하소연을 할 수도 있겠지만, 걷는 이에게는 해도 해도 너무한 방해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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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올 여름처럼 100여 년 동안 묵혀둔 기록들마저 가뿐히 갈아치우는 기세 아래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고작 10여 km를 걷는 여정이건만 찌는 더위를 생각하자면 걷는 행위 자체보다 집 문밖을 나서는 결심이 더 어렵다. 강릉 바우길 제1코스인 <선자령 풍차길>을 걷고자 했던 일이 꼭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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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가는 길
길은 구(舊)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영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오랜 세월 동안 오고가는 이의 쉼터였던 이곳은 옛 영화를 잃은 폐광촌마냥 그저 한적하다. 다만 선자령길이며 대관령길을 걸으러 오는 이들과 인근의 양떼목장을 보러 오는 이가 늘어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는 듯해보였다.
선자령길은 이곳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해 국사성황사, 풍해조림지, 목장길, 선자령, 동해전망대를 거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인지라, 계곡길과 능선길 어느 쪽을 골라 걸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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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라는 고색창연한(?) 이름이 주는 호기심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고 만다. 국사성황사까지는 포장이 되어있는 임도(林道)라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데워진 콘크리트 바닥에서 쏟아져 나오는 열기가 제법이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은 길이건만 시작부터 헉헉댄다.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이 이어지고, 또 그만큼의 푸념 아닌 푸념은 스스로의 발걸음을 붙든다. 그 와중에 땀은 왜 그리도 흐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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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 어떤 상황이 길 위에 있더라도 일단 길 위에 몸을 부려놓기만 하면 몸은 저절로 제 갈 길을 간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투덜대고 설사 발을 질질 끌며 걷는다 해도 결국은 원했던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보여행자의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속성이라면 속성이다. 그러고 보면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걷기든, 무엇이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시작은 언제나 반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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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서면 그렇게 스스로는 도보여행자가 되고, 도보여행자는 길에 집중하게 된다. 그 집중의 결과는 우선 길 위의 생명체들과의 만남이다. 그 생명체들 중의 으뜸은 야생화다. 걸으며 들꽃을 만나고, 그 꽃 앞에 쪼그려 앉아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다가 요모조모 카메라를 들이대고 수십 번의 셔터 소리 끝에 그들을 담아내면 커다란 선물이라도 받은 양 으쓱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항상 경험하는 바이지만 사진으로 그들을 만나는 순간, 그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스스로의 능력 부족에 실망하기 일쑤다. 그렇다고 자책할 일은 아니지만 아쉽기는 하다. 굳이 모두가 작품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발견했더라면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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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선자령 가는 길 어느 즈음에도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렇게 어디에도 생명은 존재하고, 그 아무 곳에서도 꽃들은 그들이 품은 아름다움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름을 알지 못하여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과문함이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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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을 모신 국사성황사
멀리서 징과 북치는 소리가 가시철망 같은 뜨거운 빛살을 뚫고 산언저리에 가득하다.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다. 국사성황사의 별채 건물에서 굿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국사성황사는 성황당과 산신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황당 안은 들고나는 날짐승들이 요란하다. 모시는 산신(山神) 앞의 공물을 탐내는 까닭이다. 제단 앞에는 과일이며 쌀이 정성스럽게 쌓여있는데, 이 공물들을 날짐승들이 저들이 맡겨놓은 양식인 양 들락거리며 축내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살며시 다가가자 도적질을 들킨 놀란 놈들이 도망치느라 우당탕 쿵쾅 난리가 아니다. 그 와중에 공물 그릇이 엎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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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 옆 기도처에서는 금슬 좋아 보이는 부부가 치성을 드리느라 여념이 없다. 어떤 사정이 있어 그들을 기도처로 불러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기도는 정갈하면서도 경건하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곳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는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의 국사성황을 모시는 집이라고 한다.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가 바로 이곳에서 올리는 제사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이다. 성황당은 신라 말의 승려인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를 모시고 있고, 산신당은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산신(山神)으로 모시고 있다.
국사성황사를 벗어난 길은 본격적인 선자령 산행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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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능선길에 발에 들이다
강릉 바우길의 제1코스인 선자령길은 '선자령 풍차길'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강릉 출신의 소설가인 이순원(*이순원은 강릉 바우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풍차라... 왜 이런 이름을 달고 있을까? 선자령에 올라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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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조릿대숲을 지나고, 무릉도원으로 가는 통로이기라도 하는 양 음험하고, 또 신비스럽다. 앞을 막아선 돌계단을 오르자, 시야가 뻥 뚫린다. 선자령길 중 능선길로 접어든 것이다. 저 멀리에서는 풍력발전기의 바람개비가 느리게 몸을 움직이고, 구름이 닿을락 말락 산들이 가없이 이어진다.
얼마간의 임도를 걸어가자, 삼거리의 이정표는 왼손을 들어 선자령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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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숲길이다. 숲을 뚫지 못하는 햇살이 이제는 만만하여진다. 그저 무심히 걸으면 될 일이다. 서두르던 걸음도 한결 여유가 느껴진다. 소요하듯 가만히 발걸음을 떼어놓기만 하면 길은 저절로 열린다.
사실 선자령 정상의 고도가 1,157m에 이르는지라 은근히 걱정을 하였건만, 길은 전혀 산으로 가는 그 길이 아니다. 그저 평탄하다. 이유는 출발점인 대관령휴게소의 고도가 해발 850m에 이르는지라 고저 차이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듯 걸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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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하다
가도 가도 숲길이다. 간간이 바람마저 동행하는 터에 어느 순간 폭염을 잊었고, 간신히 숲을 뚫고 길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오히려 생경해진다. 그렇게 길 위로 내려앉은 햇살에 의해 그려진 음영의 조화는 길에 입체감을 더하고, 덩달아 도보여행자의 눈은 풍성해진 풍경에 흐뭇해진다.
덩달아 더위에 안달복달하던 걸음은 길의 느긋함에 편안해지고, 또 여유로워진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수많은 산들과 그 산을 터전 삼아 뿌리를 내린 숲들, 이따금씩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 놀라 경고음을 발하듯 푸드득대며 떨구는 새들의 지저귐...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무심히 미소를 머금게 한다. 길 위에서 발견하는 절대고독의 평화였던 것이다. 또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따뜻하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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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산보하듯 걷는 이 유유자적이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휴식임을 깨닫는다. 더위에 성마른 마음은 한결 편안해지고, 잔뜩 긴장하였던 발걸음에도 여유가 생긴다. 가만히 내딛기만 하면 길은 저절로 열린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라더니, 이 길의 주인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만의 독차지였던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절대고독과 더불어 온다더니 실상이 그러했다.
나무들이 호위하며 안내하는 그 길에 있는 것이라고는 무한한 적막감. 산은 적막하지 않을 때 더 이상 산이 아니라고 했던가. <칼의 노래>를 쓰고 자전거 여행을 즐겼던 작가 김훈은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하다'고 했었다. 새삼 그의 말을 곱씹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적막한 산은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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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무감으로 행해진 산행일지라도 산 위에 있으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고, 또 열린다. 머무름의 단조로움은 소요하듯 걷는 걸음 속에서, 그 걸음이 이끄는 풍경의 변화 속에서 잊혀져 간다. 아니 어쩔 때는 잠시 머물러 어떤 풍경 하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살면서 강박처럼 ?기는 '무언가를 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틈이자 여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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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떠가는 구름이며, 첩첩이 잇대어 있는 산들의 깊은 골짜기며, 작은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바람 한 점이며, 무심한 듯 아는 체 하는 들꽃들은 또 어떠한가. 세계는 어느 한 순간, 어느 풍경 하나에도 담겨져 있음을 산에서, 적막한 어느 공간에서 깨닫게 된다.
문득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나는 것을 느낀다. 사는 게 별 게 아님을 새삼 또, 깨달은 것이다. 역시나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걷는 것이 어느 순간에는 휴식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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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식이란 시간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주어진 시간을 대하는 태도다.
<행복의 중심 '휴식'>의 저자인 울리히 슈나벨에 따르면 휴식이란,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 휴식의 본래의 의미라는 말이다. 새삼 숲으로 난 길을 걷는다는 것은 휴식의 의미에 딱 들어맞는 행위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좁지도 넓지도 않은 숲으로 난 길을 독차지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와 만나게 된다. 딱히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희미하게 들여다보이는 그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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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휴식을 규격화하고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휴식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다만 충분하면서도 여유로운 휴식이 가능할 때라야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생기고, 내면의 깊숙한 자아와 대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휴식이란 굳이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이 느긋해지는 여유와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이따금씩 다가오는 내 안의 평화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 아닐까. 스스로와 만나는 그 찰나의 느낌이야 부지불식간에 왔다가 가는 것이니 구태여 연연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어느 순간 내가 만난 내 안의 나와 그로 인한 작은 변화는 겨울밤 마당을 가득히 채우는 눈처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조용히 내면에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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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휴식이란 시간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주어진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은 인식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오늘같이 더운 날에 산길을 헤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휴식의 시간이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고행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세상을, 또는 내 자신을 어떤 시각,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풍경도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태도가 전제될 때 온전히 느끼고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결국 휴식마저도 주어진 시간과 상황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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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에게는 경쟁을 통해 승리의 역사를 써나가는 것이 인생의 묘미이고, 즐거움일 수 있으나, 평범한 우리네는 경쟁이라는 쉼 없는 전진의 행군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휴지(休止)의 시간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시간은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 가능한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휴가가 휴가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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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길은 가도 가도 숲으로만 이어진다. 평탄하면서도 고즈넉한 산길이 주는 안온함이 있다.
굳이 멀리 바라볼 필요도 없이 내 발이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는 바로 앞만 바라보며 걸으면 될 일이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여기'처럼 말이다. 많은 선지자들이 전하는 진리 중 으뜸 역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과거에 붙들리지 말고, 미래에 저당 잡히지도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그 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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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굳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산에서의 걷는 행위는 '바로 여기 이 순간'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내 눈 앞을 살피지 않는다는 것은, 길 곳곳의 돌부리에, 나무 등걸에 걸려 나동그라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멀리 바라보기 위해서는 당장 내 발밑, 다음 걸음을 내딛을 그곳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정상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걸음들 말고는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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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작은 언덕을 오르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아득히 펼쳐지는 산들과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푸르름의 바다...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이 있다. 우두커니 바위에 앉아 이대로 머물러 있어도 여기에 온 보람으로는 충분할 듯싶다.
● 동해바다, 그리고 강릉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얼마쯤인가를 더 허위허위 올라가자 나무 덱으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나타난다. 새봉전망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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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멀리 바다다. 아득히 펼쳐진 하늘이 힘차게 뻗어가다 어느 순간 툭~ 바다에 떨어지고, 바다는 그 하늘을 온 힘을 다해 떠받히느라 얼굴마저 시퍼렇게 질린 채 용을 쓰고 있었다. 차라리 저 멀리 발치 아래 산과 바다 사이에 가로놓인 강릉 시내만 저 홀로 고요하다. 저 산 아래 멀고 먼 바닷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고향 남대천이 보이고,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노래하던 경포호도 지척이다.
최근 들어 커피 도시로 성가가 드높은 강릉 시내에 들러 얼음 동동~ 아이스아메리카노라도 한잔 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가야 할 길을 마저 걷는 것이 우선이다. 그나마 잠시의 짧은 머무름이 다리에 힘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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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의 노래를 듣다
길은 다시 숲으로 이어진다.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김훈은 '숲 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고 했었다. 그 바람은 '마음의 바람'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정작 숲 안에 스스로 가둬놓고 숲을 바라보면 어느 틈, 어느 자락에선가 바람이 일 것만 같고, 그 바람들이 살그락대며 나뭇잎을 흔들어줄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설사 그것이 뜨거운 여름날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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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서면 몸은 가두어진 듯 아닌 듯 그 폐쇄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첩첩의 나무들로 둘러싸인 울타리 속에서 외부의 세계와 격리된 느낌이 주는 독립적이면서도 아늑한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실상은 숭숭 뚫린 열린 공간이기에 벽 안에 갇힌 폐쇄성이 주는 답답함이 없는 공간이 바로 숲이다. 그래서 숲에 서면 마음은 가라앉고 머리는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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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걷다 문득 멈춰 서서 가만히 눈을 감으면 이파리에서 이파리로 전달되는 숲의 변주는 여느 명상 음악을 능가한다. 다양한 나무의 이파리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바람을 맞고, 또 그 바람을 흘려보내면서 살랑대기도 하고 서로의 몸을 부딪혀 와글와글 소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그 와중에 땅으로 내려앉지 못한 여름날의 햇살은 숲의 지붕인 이파리들 위에 머물면서 이파리들이 흔들리는대로 그렇게 흔들리며 소리를 좇는다. 빛과 소리의 이중창이다.
그렇게 빛살이 흩뿌려진 길 위에서, 바람의 소리를, 숲의 노래를 듣는다. 길은 아직도 선자령에 이르지 못했다.
(**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한 자락을 넘어서고 있는 때에 여름날의 풍경을 전하게 됨이 아쉽고 미안할 따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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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자령 가는 방법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영동고속도로 횡계 톨게이트 출구에서 우회전 900m → 삼거리에서 좌회전 → 구(舊)영동고속도로 5km 진행 → 대관령휴게소
<대중교통의 경우>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횡계 가는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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