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팅 비치는 시드니 시내에서 페리를 타면 12분 만에 닿는 타롱가동물원 바로 옆에 있다. 선착장에서 이어진 호젓한 오솔길을 200m만 걸어가면 아담한 해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해 호주를 방문한 한국인은 30만명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직항 노선이 있는 시드니는 가장 많은 한국 관광객이 찾는 호주 도시다. 세계 3대 미항답게 시드니엔 볼거리 천지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동물원이나 농장을 방문해 캥거루와 코알라 구경을 하고 나면 결국 남들과 똑같은 천편일률적인 여행이 되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뉴포트 비치에서 파도를 타는 서퍼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색다른 시드니를 엿보고 싶다면, 남과 다른 여행을 원한다면 시드니 외곽으로 떠나보자. 시드니 북부엔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해변이 수십여개 널려 있다. 노던 비치(Northern Beaches)로 통칭하는 이 해안가에서 수상 스포츠에 도전하거나 한가로이 산책과 낮잠을 즐겨보자. 잠시나마 현지인이 된 것처럼. 바다, 하늘, 구름, 바람, 파도, 숲… 경이로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매일 공기처럼 만끽하는 시드니사이더(Sydneysider·뉴요커, 파리지앵처럼 시드니 사람을 이르는 말)들에게 마음 깊이 질투심이 일 정도다.
시드니 노던 비치의 흔한 산책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한적한 해변과 아름다운 서점들
첫 번째 목적지는 애벌론(Avalon) 비치다. 애벌론은 시드니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40㎞ 정도 떨어져 있다. 차로 1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와 트램, 페리와 기차가 촘촘히 연결된 시드니 시내 및 인근 주요 관광지와 달리 북부의 해변들로 가는 대중교통은 드물다.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해 가야 한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다.
애벌론의 에어비앤비 숙소 테라스 난간에 내려앉은 앵무새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고운 모래사장이 500m가량 이어진 애벌론 비치는 이른 새벽부터 저녁노을이 질 무렵까지 종일 서퍼들로 붐빈다. 한낮의 백사장은 소풍 온 가족과 연인들이 점령했다. 선탠을 하고 물놀이를 하고 파라솔 아래 도시락을 까먹는 풍경은 여느 해변과 다름없지만 뭔가 큰 차이가 느껴진다. 바로 여유다. 해변은 크고 피서객 수는 적다. 게다가 비슷한 절경을 품은 해변이 5분, 10분 거리에 계속 나온다. 빌골라 비치, 뉴포트 비치, 클레어빌 비치…. 그러니 우리네 북적이는 한여름 피서지 같은 답답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뉴포트 비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애벌론을 포함한 노던 비치 지역은 시드니 토박이들이 관광객으로 번잡한 도시를 피해 찾는 휴가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마다 멋진 저택이 즐비한 부촌이기도 하다. 거리마다 한적함과 넉넉함이 스며 있다. 애벌론 비치를 찾은 9월은 호주의 봄이 한창이었다. 한낮 기온이 20도 이상 올라갔지만 아직 바닷물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망설임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애벌론 비치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가족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해변의 양쪽 끝은 깎아지른 사암 절벽이 둘러싸고 있다. 바닷물에 깎여나가 여러 겹의 층이 드러난 암벽은 지질학 박물관에라도 온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 절벽 아래 갯바위를 막아 만든 수영장이 있다. 시드니 북부 해변마다 바닷가에 딱 붙어있는 이런 수영장이 꼭 하나씩 있다. 록풀(rockpool)이라고 부르는 이 수영장은 대개 아이들과 노인들 차지다. 가끔씩 갯바위 가까이 와 부딪힌 파도가 수영장 안으로 요란하게 하얀 포말을 쏟아낸다. 그렇게 바닷물을 맞으며, 남태평양 먼 바다를 바라보며 하는 수영을 어디서 또 경험할 수 있을까.
애벌론 비치의 록풀 옆에서 한 소녀가 들이치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바닷가 물놀이도 슬슬 지겨워지면 마실 나설 차례다. 좁은 찻길 하나만 건너면 소박한 상점가가 이어진다. 작지만 영화관도 있다. 마트나 카페에선 맨발로 다니는 사람도 자주 눈에 띈다. 한 골목길엔 아예 ‘맨발 도로’라고 벽에 써 있다. 추천하고 싶은 방문지가 있다. 둘 다 서점이다.
해변가 책방은 어린이와 10대를 위한 책이 특히 많다. 책방 주인 리비 암스트롱은 유년 시절 어린이책 서점에서 일했던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먼저 ‘해변가 책방’(Beachside Bookshop). 동화 속 서점처럼 파스텔톤으로 예쁘게 꾸몄다. 둘러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만에 읽은 정말 재미있는 책” “우리 가게의 2018년 베스트셀러” 책장엔 주인장 리비가 손님들을 위해 책 내용과 감상을 짧게 적은 메모가 잔뜩 붙어있다. 스코틀랜드의 헌책방 주인이 쓴 <책장수의 일기>라는 에세이를 골랐다. 리비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며 웃어보였다.
서가엔 직접 쓴 책 소개 메모가 가득하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92년 문을 연 ‘북코치노’(Bookoccino)는 애벌론의 사랑방 같은 서점이다. 이름(북+카푸치노)에서 알 수 있듯 카페를 겸한 서점인데, 주말이면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 신문을 읽고 담소를 나눈다.
애벌론의 명물 서점 북코치노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북코치노는 올해 초 주인이 바뀌었다. 뉴욕타임스와 뉴요커에서 국제뉴스로 이름을 날린 저널리스트 레이먼드 보너(76)가 서점을 인수했다. 그는 호주 출신 언론인인 아내와 30년 넘게 노던 비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다 서점과 연을 맺었다. 카운터 근처의 가장 잘 보이는 매대에는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유명한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 행정부의 혼란상을 고발한 신간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가 잔뜩 쌓여 있었다. 퓰리처상을 받은 서점 주인다웠다.
북코치노 안쪽엔 커피와 간단한 스낵을 파는 바가 있고, 손님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볼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돼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애벌론에선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었다.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은 2층짜리 저택이었다. 방 4개에 널찍한 거실과 정원, 테라스, 차 2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딸려 있었다. 하룻밤 대여료는 약 30만원. 특급호텔과 비슷한 가격이지만 두세 가족이 나눠 사용할 경우 부담은 훨씬 덜하다. 숙소 테라스에서 감상한 석양과 일출은 여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애벌론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맞은 일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완비된 주방기구를 활용해 저녁도 직접 해먹었다. 장 보러 간 마트에서 호주 식문화를 잠시 배웠다. 끝부분을 빨갛게 칠한 바나나가 있어 살펴보니 유기농에 지속가능농업 인증을 받은 100% 국내산 제품에 붙는 표시라는 설명이 있었다. 달걀은 대부분 방목한 닭에서 나온 것이라는 문구(cage free)가 적혀 있었다. 그것도 1㏊당 풀어놓는 닭 마릿수까지 1000마리, 2500마리 식으로 구체적으로 표기한 제품이 다수였다. 200g짜리 호주산 쇠고기 안심 가격은 단돈 5000원. “이게 호주 여행하는 맛”이라는 일행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디와이(Dee Why) 비치의 록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람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등대 풍경과 ‘물 위의 해먹’
애벌론 비치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아 10분쯤 달리면 웨일(Whale) 비치에 닿는다. 과거 고래가 출몰해 붙은 이름이다. 앞바다는 돌고래만(Dolphin Bay)이라고 부른다. 웨일 비치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의 식당이 여럿이다. 부티크 호텔을 겸한 조나스 레스토랑이 특히 유명하다.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모비 딕’(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이 포경을 주제로 쓴 소설)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지만 방문한 일요일엔 문을 열지 않았다. 바로 근처의 ‘웨일 비치 식당’(Whale Beach Deli)으로 향했다.
웨일 비치 델리의 심볼이 새겨진 핫초콜릿과 아보카도 토스트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지극히 평범한 이름과 달리 음료와 음식이 모두 특별했다. 카푸치노를 주문하니 라테 아트 위에 진하게 닻 모양을 그려 내왔다. 가게의 심볼이라 했다.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으깬 아보카도와 토마토를 가득 올린 토스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상큼한 맛이었다. 간단한 한 끼 식사에 호들갑스럽게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식사 내내 야외 테이블에 내리쬐던 햇빛과 시원한 바닷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도 그날 작은 행복의 구성요소였음은 물론이다.
바렌조이 등대에서 바라본 팜 비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웨일 비치에서 다시 10분쯤 북상하면 부메랑 모양으로 생긴 땅끝에 다다른다. 땅끝은 야트막한 산이다. 정상까지 두 갈래 길이 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도 10~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산 위에는 사방으로 탁 트인 바다를 비추는 ‘바렌조이 등대’(Barrenjoey Lighthouse)가 서 있다. 1881년 세워진 등대는 국립공원의 일부다. 매주 일요일에는 등대 안을 둘러볼 수 있는 가이드투어도 진행된다.
바렌조이 등대가 자리잡은 산 위 전망대에서는 매년 5~11월 사이 앞바다에서 유영하는 고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등대를 중심으로 동쪽 바다는 매년 5~11월 새끼를 데리고 해안에서 남북 2500㎞ 반경을 이동하는 고래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포인트다. 고래가 나타나는 방향으로 벤치도 마련돼 있지만 바다 쪽을 향한 널찍한 바위에 털썩 걸터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그만이다. 먼 바다엔 하얀 점처럼 요트들이 떠 있다.
팜 비치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튿날 오전 일찍 애벌론 비치에서 차로 5분 떨어진 클레어빌(Clareville) 비치로 향했다. 애벌론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스탠드업패들보딩(SUP) 업체인 토니 헨리의 가게를 찾았다. 전날 예약하며 통화한 토니 대신 아들 테오(24)가 나와 있었다. 키 190㎝가 넘는 껑충한 청년이 호주식 악센트를 최대한 자제한 쉬운 영어로 타는 법을 가르쳐줬다. 스탠드업패들보딩은 말 그대로 서서 보드를 타는 스포츠다. 서핑보드보다 좀 더 큰 보드 위에 올라서서 두 손으로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몇 달 전 바이칼호수 위에서 석양을 배경으로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본 뒤 바로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참이었다.
스탠드업패들보딩 강사 테오 헨리가 바다로 나가기 전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보드 가운데 자리 잡고 편안하게 서 있어요. 다리나 발에 힘을 주면 오히려 균형 잡기가 힘들어요.” 설명은 간단했지만 실전은 역시 쉽지 않았다. 보기 좋게 넘어져 물에 세 번이나 빠졌다. 찬물에 몸이 젖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입으론 웃음이 터졌다. 30여분쯤 씨름한 뒤에야 어느 정도 자세를 유지하며 보드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스탠드업패들보딩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클레어빌 비치는 육지로 깊이 파고들어온 만에 자리 잡고 있다. 파도가 거의 없단 얘기다. 수심이 얕은 바다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트들이 정박돼 있었다. 배 옆구리와 꽁무니엔 저마다 위트 있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망자’와 ‘집시 해적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며 보드는 전진했다.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했다. 어느 순간부턴 노를 젓기도 귀찮아 보드 위에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물 위의 해먹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물살에 몸을 맡겼다. 구름 사이로 태양이 넘나들며 낯을 간질였다. 바람 소리가 귀에 착착 감겼다.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웠다.
*노던 비치 여행팁
-먼저 숙박. 호텔이나 B&B 같은 숙소가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게 좋다. 노던 비치 전역에 걸쳐 딱 하나만 고르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에어비앤비 숙소가 있다. 가격은 10만~50만원대까지 다양하다.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면 선택이 쉬워진다.
-렌터카 운전은 주의할 게 여러가지다. 일단 차선이 한국과 반대다. 중앙선 왼쪽으로 달려야 한다. 따로 차선 표시가 없는 좁은 골목길에선 헛갈려 역주행 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해변과 관광지는 유료 주차장이 있다. 주차비가 꽤 비싸다. 보통 시간당 8호주달러(약 6400원)를 받는다. 무인기계에 사용할 시간을 입력하고 신용카드나 동전으로 결제하면 된다. 렌터카 반납 전 들르게 되는 주유소는 전부 셀프다. 한국과 달리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도 경유가 아닌 휘발유(가솔린)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유 전에 잘 확인해야 한다. 기름을 넣은 뒤 카운터에 가서 주유기 번호를 말하고 계산하면 된다. 운전할 때 구글맵이나 ‘Waze’ 같은 스마트폰 앱으로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꼭 알아둬야 할 게 있다. 어디서나 인터넷이 시원하게 터지는 한국과 달리 시드니의 고속도로 터널에선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될 때가 잦다. 가는 길의 지명과 도로명을 대략이라도 파악해두지 않으면 빠져나가야 할 출구를 제때 찾지 못해 본의 아니게 도시를 여러 차례 왕복하며 ‘강제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다. 경험으로 전하는 충고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다고 해도 북부 해변은 너무 멀고 불편해 못 가겠다는 이들에게 팁 하나. 시드니 시내에서 지척인 타롱가동물원(Taronga Zoo) 근처에도 기가 막힌 해변이 하나 있다. 위팅(Whiting) 비치다. 페리를 타고 동물원 선착장에 내리면 다들 바로 앞에 있는 케이블카로 향하는데, 그걸 타지 말고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된다. 잘 다듬어진 나무데크 길을 200m쯤 걸으면 숲이 끝나는 지점에 백사장 길이가 50m쯤 되는 작고 아담한 해변이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운이 좋다면 한낮의 백사장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드니(호주)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 [인기 무료만화 보기]
▶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