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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유치원생 둔 기자 엄마 “아이 미운털 박힐까봐 나도 침묵했다” [더(The)친절한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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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친절한 기자들] 비리 유치원 기사 쓰는 엄마의 반성문

내로라하는 ㄱ유치원 보내던 친구

“교육비 외 전부 현금으로 보내래”

기사 쓰자는 제안에 다시 입밖에 안내

알리미 공시 보니 ‘현장학습비 0원’

내아이 유치원도 감사 받은 적 없어

바쁘단 핑계로 학부모위원 참여 외면

운영위가 급식 등 심의 권한 갖지만

항상 정원 미달…“그냥 이름만 올려요”

학부모가 운영위 제자리 돌려놔야


한겨레

10월15일 한겨레그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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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교육비 외에는 전부 현금으로 아이한테 보내라고 해. 이거 이상한 거 맞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한 친구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친구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ㄱ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었다. “중간중간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내라고 하는지… 전부 기억도 안 나. 알림장에 ‘아이 가방에 넣어서 보내라’고 적혀 있는데, 10만원이 넘는 돈을 아이 가방에 넣어 보낸 적도 있다니까.”

기사를 쓰자는 제안에 친구는 망설였다. 정의감은 불탔으나,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 뒤로 친구는 유치원 이야기를 더는 꺼내지 않았다.

지난 11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감사에서 비리 혐의가 적발된 유치원 1878곳의 실명을 공개했다. 친구의 ㄱ유치원도 목록에 있었다. 유치원 정보공시 누리집 ‘유치원알리미’에서 ㄱ유치원을 검색했다. 친구가 냈던 수많은 ‘현금’은 교육·보육 비용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예·결산 회계자료에도 현장체험학습비는 0원이었다. 숱하게 다녀온 아이들의 현장학습이 서류에서 사라졌다. 친구에게 학부모들의 반응을 물었다. 시시콜콜 육아 정보가 오가던 단체대화방이 잠잠하다고 했다. “대부분 첫째 보내고 둘째까지 생각하고 있어. 문제를 제기하면 내 아이한테 미운털 박힐 텐데 누가 말하겠니? 우린 ‘을’이야.”

생각해보니 5살 아이를 올해 처음 유치원에 보낸 내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은 서울시교육청의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궁금하면 유치원에 문의해보라’고 기사를 써놓고도, 정작 유치원 문 앞에서 나는 침묵했다.

지난 3~4월께 아이가 ‘유치원 운영위원회 학부모위원 선출’ 관련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위원을 희망하는 학부모는 지원서를 내고, 입후보자가 많으면 투표로 위원을 선출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가욋일을 떠맡기 싫었다. ‘회사 일만으로도 바쁘다. 기자 엄마가 이런 거 하면 싫어한다’는 핑계로 지원하지 않았다. 며칠 뒤 지원자가 적어 학부모 5~6명이 무투표로 당선됐다는 알림이 왔다.

유치원 감사 결과 공개로 많은 유치원 원장이 교비를 ‘쌈짓돈’처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교비로 180만원짜리 김치냉장고를 사 집에서 쓰다 적발됐다. 사립유치원 원장은 냉장고 사며 사은품까지 야무지게 챙기는 ‘깨알 살림’을 했는데, 매년 혈세 2조원을 지원하는 정부는 사립유치원 회계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 원장의 부도덕과 정부의 방만함만 탓하기엔 뒤통수가 뜨거웠다. 매달 교육비 수십만원을 내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학부모위원 지원 서류가 떠오른 탓이다.

정부는 유치원의 투명한 운영을 위해 유아교육법을 개정해 2009년부터 유치원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운영위는 학부모위원 60~70%와 교원위원 30~40%로 짜이는데, 유치원 운영을 심의·자문하고 유치원의 주요 규칙을 제·개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예·결산 자료도 요구해 검토할 수 있다. 아이들 ‘급식’과 관련된 위생·식재료·예산 관리 문제도 운영위원회가 심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유치원 운영위원회는 학부모의 무관심 속에 형식적으로 운영된다. 한 유치원 교사는 “학부모위원 경쟁률이 1:1이면 양호한 것”이라며 “대부분 정원에 미달해 학부모에게 전화를 돌려야 한다”고 전했다. 이 교사는 “물론 ‘어머님·아버님 그냥 이름만 올리시는 거예요’라고 설득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조금씩 희망을 본다. 유치원 실명 공개 이후 비리의 상징처럼 보도됐던 ‘환희유치원’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나가는 중이다. 원장의 회계 부정이 드러난 뒤 학부모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유치원 정상화에 나섰다. 비리를 저지른 원장을 경영에서 제외했고, 급식업체도 새로 선정했다. 매일 급식 상황을 점검할 수 있게 식자재를 온라인 알림장에 올리고, 행정인력도 추가 배치했다. 경기도 동탄새도시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환희가 가장 깨끗하다. 환희로 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환희유치원 비대위 관계자는 “무관심은 아니었는데 유치원을 너무 믿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며 “비대위 이후 장기적으로 유치원 운영을 점검할 수 있게 운영위원회를 다시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회계시스템인) 에듀파인이 도입되면 비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국공립은 괜찮을까요?” 국공립과 사립 모두를 경험한 한 유치원 교사는 에듀파인이 비리를 뿌리 뽑지는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심의 영역 밖에 방치된 시스템이 또 다른 사각지대를 낳는다고 진단했다.

유치원들은 내년 초 새 학부모위원을 뽑는다. 학부모들은 각 교육청 누리집에서 ‘유치원 운영위원회 업무편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라도 참여를 진지하게 고민하려 한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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