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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절정은 어쩌면 생의 가장자리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만추(晩秋)의 그늘에서, 중년의 '그'를 만나다
능선을 벗어난 길은 능선 안으로 접어든다.
크고 깊은 산이 펼쳐놓는 길들이 풍성하고, 또 너그럽다. 순한 산의 모습은 걷는 이들의 마음마저도 풀어헤쳐놓는다. 그러니 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렇게 순한 길을 걸을 때 가끔씩 생각이라는 것을 할 틈이 생긴다. 그렇다고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냐 마는 언뜻 언뜻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슨 생각인가가 떠오를 때가 있다. 어쩌면 생각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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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왠지 쓸쓸하다.
제 처지에 빗대어 단풍이며 낙엽들을 바라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초라해진 스스로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세월 무상, 자아 발견이었다.
신체적인 강건함은 시나브로 이미 정점을 지난 지 오래인 듯하고, 직장에서는 젖은 낙엽처럼 바닥에 딱 들러붙어 누가 뭐라 하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버텨야 하는 연배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옆구리에서부터 스산한 바람이 불고, 소소한 잔바람에도 휘청대고 마는 자신과 연민(?)의 해후를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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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그 놈의 단풍과 낙엽에서 자신의 처지를 발견했더란 말인가.
일은 기어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렇게 서서히 단풍을 지나 '낙엽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외롭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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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곁에 있어도 외롭다는 사랑 타령이 아니라, 정작 돌아보니 누군가가 곁에 없더란 말이다. 어느 순간 소주 한잔이 그리워 몇 백 개의 전화목록을 뒤적거려 보지만 정작 전화를 걸 수 있는 친구는 고작 몇 명밖에 되질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절망했던가. 늘 바쁜 일상 속에서, 또 많은 사람들 속에서 치이며 살고 있었기에 설마 했었고, 또 그들이 친구인 양 착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군중 속의 고독'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가정과 직장, 세상 어디에서도 부유물처럼 떠도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서서히, 부지불식간에, 그렇지만 선명한 통증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름도 서글픈(?) '중년'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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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건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를 외쳐보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 버스일 뿐, 지나간 버스와 가버린 애인은 손들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절망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깨닫게 되는 외로움... 아~ 외로움이란 게 이리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이었더란 말인가. 뒤늦게 회한 가득한 탄식을 쏟아내지만 어찌 할 방도는 없고,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누구에게 다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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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외로움을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라고 말한다. 지독한 외로움은 인지적 능력의 저하는 물론이고, 신체적인 무기력증까지 동반한다. 나아가 외로움은 사람을 망가뜨리고 극단적인 경우 죽음으로까지 몰아간다고 한다.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외로움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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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움,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
외롭다는 것이 단순한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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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니까 사람'이라던 정호승 시인이나 그 시(詩)에 곡을 입힌 안치환의 절규가 워낙 그럴 듯해 보여 '오지 않는 전화는 기다리지 않는 것'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거니 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외로움은 죽음을 부르는 침묵의 암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보다 남자가 더욱 위험하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여성들은 자신만의 커뮤니티가 확장되는 반면, 남성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늙은 남자들은 아내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고, 아내는 꽁무니 뒤의 성가신 남자를 떼버리지 못해 안달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된 농담 중 친구 모임에 갔다가 돌아온 늙은 아내가 자신만 남편이 있더라며 한탄을 했다는, 그 농담이 어쩌면 무섭게도, 농담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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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그 잃어버린 진실>의 저자인 스티븐 비덜프에 따르면, 남자의 적, 즉 남자들을 가두고 있는 감옥은 "외로움, 치열한 경쟁, 평생 지속되는 감정적인 수줍음"이라고 한다. 남성의 적은 내면에, 자신의 심장 주변에 쌓아 놓은 벽 안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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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줍음이라니... 웬 수줍음? 이건 아니라고 애써 도리질을 해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줍음이야 말로 남자를 규정하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사회성이 떨어진다. 흔히 말하는 낯가림이 심하다는 말이다. 남자들은 보통 자기 자신의 맨 얼굴이 아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데 익숙했던 것이다.
그것이 높든, 낮든, 또 어떤 모습이든 '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울타리가 제공하는 역할 안에서 세상과 만나고 소통하는데 익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던 것이다. 자신 안의 수줍음과 사회성 부족은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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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남자를 감싸고 있던 울타리는 헐거워지고, 역할은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홀로서기'에 내몰린 그들에게 찾아오는 건 세상과의 연대감 부족에서 비롯된 '외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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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삶이 '잘 사는' 삶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전문가들의 조언을 종합해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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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신체적 에너지가 높고, 더 낙관적이며, 비교적 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법으로는,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가족이 중요하지만, 어쩔 때에는 가족보다 친구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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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 인생이란 우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가늠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삶이 유쾌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결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신나는 일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 외롭다>, 토머스 조이너)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면, '재미', '행복', '즐거움'의 내러티브가 진짜 성공한 삶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누군가도 있다. '즐거운' 삶이 '잘 사는' 삶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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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삼, '걸어야 할 이유'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 감사하는 마음, 친구, 즐거움까지도... 모두 다 길 위에서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인생이 고달프면 걸으라 했던가.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로워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이 순간 함백산을 걷고 있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증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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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외로움이라는 특별한 상황이나 감정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외로움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또는 심리적인 상황들이 한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많은 효용성과 가치들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대부분의 창조적인 것들은 바로 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충분히 외로워져봐야 세상을, 또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제로서 외로움은 언제나 중요하고 또 유효하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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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서, 길에 취하다
멀리 또 올라야 할 봉우리가 보인다.
함백산은 크게 상함백산(지금의 은대봉), 중함백산(본적산), 하함백산(지금의 함백산)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함백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 세 봉우리를 차례로 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그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이 대단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다. 크게 고도차가 없기 때문에 조금의 오르막만 감당하면 될 일이다. 내리막이 있었으니 오르막이 있겠거니 하면 된다.
이제 길은 은대봉(銀臺峰, 1,442m)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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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처연하게 산의 등줄기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내려앉은 길은 오밀조밀 풍경을 달리하며 그들만의 깊이와 멋을 간직한 채 사람들과 동행하며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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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겉보기와는 다르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산의 모습은 순하기 그지없는 양의 모습이었지만, 그 산이 품고 있는 길은 그렇게 순박하지만은 않다. 더러는 눈을 호강시켜 줄 요량으로 낙엽에 점령당한 길 위로 색색의 단풍을 펼쳐놓아 탄성을 자아내게도 하지만, 가끔은 오르막이라도 오를라 치면 딴에는 성깔(?)을 부리느라 돌투성이의 바위 계단을 준비해 놓기도 한다.
그 순하지 않음이 다양한 길을 품을 수 있는 이유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함백산은 기운차고, 또 유려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다양한 길을 간직한 길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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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품고 있는 길들은 언제나 다양한 나무 군상들과의 동행이 필연이다. 무심한 길일지라도 길을 굽어보는 나무들의 표정에서 길은 생명을 얻기도 하고, 특색 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길이 되기도 한다. 함백산의 길들은 다른 많은 산야의 길들이 그러하듯 품은 이야기가 저마다 하나씩은 있어 보인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무지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미처 밝은 귀는 갖지 못했으나, 그래도 보는 눈은 있는지라, 굽이굽이 흐르는 부분 부분의 길은 걷고자 온 여행자를 멈추게 하고, 또 바라보게 한다. 후딱 내처 지나감이 아쉬운 그 길 위에서 여행자는 한동안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여행자를 멈추게 한 것이 길이었는지... 고운 단풍이었는지... 어느 순간에는 이마저도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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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단풍을 이야기하다
산에는, 길에는 여무는 가을이 쏟아내는 색(色)들의 잔치가 아찔하다. 가끔은 그 색색의 조화가 빚어내는 빛살에 눈이 시릴 지경이다.
아직도 지조가 굳은(?) 나무들은 푸르디푸른 제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제 살아있음을 목 놓아 소리쳐 보지만, 계절은 벌써 가을로 기울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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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를 아는 많은 나무들은 이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쩔 것인가. 가는 세월을 어쩌란 말인가. 가야 할 때는 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비장함까지야 바라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폼 나게(?) 가야 하는 것이다. 폼 나게 가는 것은 스스로, 제 발로, 가야 할 그 때를 알고 가는 것. 욕심내지 않으면 비굴해질 이유도 없다.
함백산의 나무들이, 그 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러했다. 비록 이마저도 낙엽으로 스러질지언정, 화장 곱게 한 그 얼굴에서 땅으로 돌아가는 자의 의연함과 스스로를 불태우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마음으로 제 살았던 터전을 밝히는 자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렇게 사람들은 떠나가는 자를 배웅하기 위해 산을 오르고, 그 산에서 그들과 대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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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이 제 몸을 열어 세상에 내어놓을 적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기어이 올라 길을 열었든, 산이 제 스스로 길을 내어놓았든, 아마도 길은 그 둘의 타협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가고자 하는 그와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그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을 타협의 절충점으로 내어놓은 것일 것이다. 최선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나마도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오르고자 했던 그와, 길을 내어준 그에게 감사를 표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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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탄과 함백산 사람들
멀리 산 아래 사람 사는 마을이 보인다.
강원도 정선군의 고한읍이다. 석탄 탄광으로 유명한 그 고을이다. 사북읍이 고한읍으로 분리되기 전인 1980년, 흔히 사북사태(舍北事態)로 일컬어지는 석탄 탄광 노동자들의 노동항쟁이 일어났던 그곳이기도 하다.
사북 사건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등에 항의해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으로, 1980년대 노동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노동 항쟁에 참여했던 81명의 노동자들은 군법회의(당시는 박정희 사망으로 인한 계엄령 치하였다.)에 넘겨져 영어의 몸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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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이들은 폭동을 일으킨 폭도로 오랫동안 매도돼 왔으나, 지난 2005년, 사건의 주역인 이원갑씨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음으로써 사북사태는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받기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이 함백산이 품은 석탄들로 인해 빚어진 일들이다. 이 석탄들은 2000년대 들어 주요한 연료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만다. 덩달아 사북읍과 고한읍 역시 '떠나가는' 고장이 되었고, 이에 지역 살리기라는 명분 아래 저 멀리 스키장 슬로프가 위치한 아래에 리조트와 카지노가 들어서 석탄이 떠난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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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의 끝에서 다음의 길을 그리다.
길은 또 다시 어디론가 향한다.
그들이 품은 이야기의 속내를 다 알 수야 없지만, 묵묵한 길은 그저 또 흘러간다. 산등성이를 따라 흐르던 길은, 어느 때에는 경사면의 비탈을 헤쳐 나가고, 바위 등성이도 타고 넘으면서 제 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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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만나는 조릿대길.
길이, 그 색이 어색하게도(?) 푸르다. 꼴에 대나무라고 곧은 성정을 버리지 못해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딴에는 그게 자신의 운명인 걸 어쩌란 말이냐고 토로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튄다. 조릿대라는 이름은 조리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대나무라 해서 얻은 것이다.
여기서 잠깐, 조리가 뭐냐고? 조리는 국자 모양으로 생겨, 쌀을 씻을 때 돌이나 이물질을 걸려내는 주방도구다.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도정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으레 쌀에는 돌들이 섞이기 마련이었고, 그 돌을 걸려 내기 위해 조릿대로 조리를 만들어 사용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복조리라는 이름만 남아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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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취해, 단풍에 취해 무심히 걷다 닿은 곳. 은대봉(銀臺峰)이다.
또 봉우리에 올랐다는 어설픈 포만감과 자부심은 배낭을 내려놓고 쉬어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의 여유를 준다. 그리고 정상이든 아니든 표지석만 보면 인증샷을 찍어야 하는 그들에게도 시간은 필요하다. 몇몇 분들은 내게 카메라를 내밀고, 나는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분들이 원했던 사진이 카메라에 담겨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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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리는 순례의 길... 삶의 길과 닮아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은대령을 넘어서자, 아뿔싸! 저 멀리 금대봉(金臺峰)이 손짓을 한다. 바로 지척이라 뛰어가면 금방일 것만 같은데... 하지만 어쩌랴! 아쉽게도 오늘은 널 만날 계획이 없었음을 이해하시라~
시들어가는 야생화 너머로 금대봉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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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봉을 넘어 선 길은 두문동재로 급전직하,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오늘의 여정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한다. 그러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인다. 아직도 몸과 마음은 백두대간의 허리를 딛고 서 있건만, 저물어가는 날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아쉬운 마음이 다음의 여정을 위한 자산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들이 산을 오르는 건 산이 높다는 걸 알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산에 가는 그들과 나는, 살아있는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함이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 역시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한 뼘이나마 성장할 때, 세상과 자기 자신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그렇게 가까워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 성장을 위한 도량 중 하나가 산이고, 그 산이 품고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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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낮아지자, 단풍은 더욱 화사하고, 마침내는 터널을 이룬다. 그 사이로 오늘 길 위의 도반이었던 그들이 간다. 함백산이 준비해둔 자연의 성찬에 발걸음마저 가벼워 보인다. 어쩌면 여러 날 동안 오늘의 성찬을 조금씩 꺼내먹으며 가을을 곱씹을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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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들과 나는, 일상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쉼표 하나를 찍었던 것이고, 그 쉼표는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문득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항구에 머물러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우리네 역시 머물러 있기에는 뜨거워지는 열정이 있고, 날씨마저 미친 듯이 좋은지라, 또 어디론가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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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백산 가는 길
** 버스 이용시
- 고한, 정선 방면 → 두문동 터널 앞 (08:30~21:30, 하루 12회, 20분소요)
- 상동 방면 → 화방재 (06:30~19:00 하루 6회, 35분소요)
** 자가용 이용시
- 두문동재 시작 : 황지교 사거리 → 화전 삼거리(삼수동사무소앞) 직진 → 38국도 고한 방면 → 두문동재
- 만항재 시작 : 황지교 사거리 → 상장 삼거리 우회전 → 31번국도 영월 방면 → 도립공원입구 직진 → 어평주유소에서 우회전 → 414지방도 고한방면 → 만항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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