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시국 베드로광장 사진 Diliff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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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서기 1년에 태어나 서기 33년에 죽었다. 예수는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베드로는 그들 중 하나였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나, 예수가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아랍어(고대~중세 중동 지역의 국제어) 이름을 선사했고, 이후 그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가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 사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로마는 골치 아픈 이단자이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는 현실의 예수를 처형하면 그 추종자들도 흐지부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죽어도 열두 제자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세계에 전파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자들은 랍비가 사라지자 여기저기로 흩어져 예수의 말씀을 세상에 전했고, 기록했다. 후세는 그들의 구도 지점에 기념 교회를 건축했고 기록을 모아 성서를 집필했다. 베드로는 예수가 처형 당한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에, 자신의 스승보다 더 힘든 방식인, ‘거꾸로 매달린’ 자세로 처형 당했다. 베드로의 주검은 당시 그리스도인 등 로마의 아웃사이더들이 처형 당하거나 죽으면 묻히곤 했던 바티칸 언덕 한쪽에 안장되었다. 서기 67년의 일이었다.
산탄젤로성에서 바라본 성베드로대성당. 사진 Wolfgang Stuck by 위키미디어, 미켈란젤로 by 위키미디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by 위키미디어, 바티칸시국 행정처 사진 Marek.69 talk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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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로마 가톨릭교회는 번성했고, 힘을 갖춘 교회는 바티칸을 ‘성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었다. 바티칸에는 종교적 신념을 목숨과 바꾼 수많은 무명인이 잠들어 있었다. 교회는 베드로의 무덤으로 추정된 지점을 중심으로 ‘옛 베드로 성당’을 건설했다. 서기 326년부터 333년의 일이었다.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은 1505년에 본격 출발해 1590년 돔 완공을 기점으로 대장정의 일단을 끝냈다. 전도하고, 이단으로 취급 당하고, 핍박 받고, 죽임을 당하고, 힘이 세지고, 죽임을 당한 곳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 일대를 성지로 만들고, 신도들이 모여들고, 심지어 여행자들까지 끌어모으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이야기는 그 뒤로도 전 세계 교회의 생성 과정의 전형을 보여 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의 중림동 약현성당과 서소문공원이, 상수동 절두산성당과 절두산순교성지가, 용산 새남터순교성지와 기념 성당이, 당진 솔뫼성지와 기념 성당이, 해미의 해미성지와 해미성당 등이 그렇다.
▶미켈란젤로와 성 베드로 대성당
성베드로 청동상 사진 Mattana by 위키미디어, 베드로성당 사진 Alberto Luccaroni by 위키미디어, 마데르노의 중랑 사진 Jean-Pol GRANDMONT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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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은 ‘옛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 또는 신축 공사를 계획한 니콜라이 5세 시대의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등 당대 최고의 건축 예술가들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아예 실질적인 신축을 전제로 설계 공모까지 감행한 율리오 2세 시대를 지나 완성에 이르기까지 120년 동안 21명의 교황, 10명의 예술가들이 설계와 변경을 거듭하며 대장정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도나토 브라만테,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안토니오 다 상갈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코모 델라 포르타, 카를로 마데르노,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이 그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한 예술가들의 면면과 그들의 활약을 이 페이지에서 모두 전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모두 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천재들이자 예술가이자, 전략가이자, 정치가이자, 야심 찬 인간들이었다. 이 중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은 미켈란젤로고, 매우 중요한 인물은 베르니니다.
미켈란젤로는 오늘날 여행자들이 만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원형을 완성하고 성당 안에 신들의 세상을 예술 작품으로 남겼다. 또한 그동안 교황이 바뀔 때마다, 책임자가 교체될 때마다 뒤집어지는 설계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변형의 악순환을 끊어 버린 현자이기도 했다. 70이 넘은 나이에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자신이 죽거나 교황이 바뀌더라도 설계도가 달라지지 않게 하려고 ‘동시다발 공사’를 감행했다. ‘빼도 박도 못 하게’ 해 버린 것이다. 또한 예술가들의 업적에 대한 야심과 그로 인한 시간과 비용의 낭비 등 병폐를 지적한 것으로 ‘추측’된다. 미켈란젤로는 1564년에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교황이던 비오 4세는 새 책임자로 미켈란젤로의 조수 자코모 바로치 다 비욜라와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조르조 바사리를 임명하면서 “미켈란젤로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절대 바꾸지 말라”고 명령, 이후 공사는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진행되었다.
‘TV ES PETRVS ET SV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VM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 사진 Luis Miguel Bugallo Sanchez by 위키미디어, 영광의 문 사진 pedronchi by 위키미디어, 대성당 사진 Diego Delso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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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를 기념하기 위한 성지다. 야고보는 예수가 죽은 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 활동에 나섰다. 그의 선교 영역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중앙 산악 지대인 사마리아 지방에서 오늘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길고 넓었다. 이베리아 반도와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서 극지점에 위치한다. 이스라엘에서 출발해 그 먼 이베리아 반도까지 들어간 그는 반도 끝인 콤포스텔라 지역에 당도한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활동하다 서기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군대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전파한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로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한 그는 어떤 이유로 다시 이베리아 반도 끝에 묻혔을까? 야고보의 무덤은 원래 예루살렘에 있었으나 기독교도들에 의해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으로 이장되었다. 한동안 그 위치가 묘연했으나 814년에 발견되었다. 야고보의 묘소를 발견한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광채에 이끌려 그 어떤 곳으로 스며들었고, 그곳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야고보의 무덤이 있던 그곳은 곧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으로 불렸고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800km 거리의 산티아고 가는 길의 종착지인 대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대부분 성당을 마주한 채 또는 뒤로한 채 눈물을 흘리곤 한다. 800km 대장정을 끝낸 여행자의 당연한 감성일 것이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은 대성당 서쪽 파사드로 올라가는 마름모꼴 계단 앞에 위치한다. 그 계단을 오르면 오브라도이로 문이 등장하고 그 문을 들어서면 ‘영광의 문’이 나타난다. 당시 스페인 건축, 조각 예술의 거장이었던 마테오가 1188년에 제작한 이 문에는 신약 성서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근거로 만든 200여 개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 성단에는 성 야고보의 좌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찬란한 황금색 성단을 배경으로 하는 눈부신 모습이다. 산티아고 즉, 성 야고보의 묘는 대성당 지하 묘소에 유골함과 함께 안치되어 있다. 순은을 입혀 조각한 유골함은 가톨릭 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은 교회와 뮤지엄, 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회는 매일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오후 8시에 닫는다.
▶노트르담 대성당
대주교의 다리에서 본 노트르담 대성당 사진 Livioandronico2013 by 위키미디어, 서쪽 파사드 사진 Tom S. by 위키미디어, 노트르담 성당의 대오르간 사진 Frdderic Deschamps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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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에서 보았듯이 프랑스 사람들은 용감하고 화끈하며 조직적이고 치밀(또는 음흉)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270여 년 전이던 1517년 10월31일, 독일의 종교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을 천명하며 가톨릭 교회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한다. 예수가 서기 1년에 태어나 서기 33년에 죽은 뒤 그의 제자들과 예수의 생각에 동의하는 수많은 추종자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점진적 발전을 거듭, 결국 유럽의 모든 나라에 절대신 예수의 존재를 심었다. 그러나 신앙에 권력이 부여되자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숱하게 벌어졌다. 그것은 대중에게 핍박과 부패로 인식되었고, 루터뿐 아니라 칼뱅,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윌리엄 틴들, 사보나롤라, 웨셀 간스포트와 같은 종교 개혁 선구자들도 ‘오직 성경’을 주장하며 가톨릭의 개혁을 이끌었다. 당시 교회의 시각으로 볼 때, 노트르담 대성당은 최악의 흑역사를 겪게 된다. 종교 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31년 만인 1548년,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기를 들며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노트르담 성당의 성상들을 ‘우상 숭배’의 결과물이라 비판하며 교회의 외부를 파괴했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는 혁명 세력에 의해 수많은 보물들이 파괴되거나 강탈당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예술 작품 중 한 그룹이던 유다 왕들의 조각상 머리는 죄 잘려 나가 성당 바닥에 뒹굴었다. 사실 유다 왕들은 기독교적 지도자들이었는데, 혁명 세력은 그들을 루이 왕가의 선조 즉, 봉건 질서의 유산으로 보고 파괴했던 것이다. 교회의 수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당은 창고로 사용되었고 성모 마리아상이 있던 자리에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기도 했다. 그때 잘려 나간 유다 왕들의 머리는 1977년에 성당 주변에서 발견되어 클뤼니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1160년 이전의 성당을 부수고 새로운 교회 건축을 시작한 노트르담 성당은 1345년에 완공을 보았고 종교 개혁 바람 속에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며, 대혁명으로 굴욕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노트르담의 최대 위기는 19세기 초에 발생했다. 당시 파리는 혁명 과정에서 파괴된 도시 재생을 논의하고 있었다. 누군가 주장했다. 구시대의 유물이자 패악의 상징, 문화유산으로 인정한다 해도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노트르담 성당도 철거해 버리자고 말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민이 그 주장에 동의했다.
노트르담 성당의 벽날개. 교회 건축사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진 Joseph Cesare by 위키미디어, 성모마리아의 문(사진 Benh LIEU SONG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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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다.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거두였던 그는 ‘노트르담 성당 철거설’이 나돌자 단박에 작품 구상에 들어갔고, 1831년 『파리의 노트르담 Notre-Dame de Paris–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작품을 읽거나 본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진 ‘노트르담의 꼽추’는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희노애락과 생로병사을 다루고 있다. 작품을 접한 사람이면 누구나 꼽추 콰지모도, 미워할 수 없는 여인 에스메랄다, 심하게 인간적인 노트르담 성당의 부주교 클로드, 얼간이 장교 페뷔스 등의 캐릭터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 묘사돼 있는 노트르담 성당을 사랑하게 된다.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민중이 노트르담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와 미래를 재해석하길 원했고 그 소망은 ‘노트르담 보존’이라는 결론을 내는 데 크게 일조한 것으로 ‘프랑스는 기록’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오늘날 파리 여행의 필수 코스로, 그저 한번 둘러보고 나오는 문화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성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활의 종교’ 기독교와 똑 닮아 있는, 불멸의 교회당이라는 사실에 전율하게 된다. 노트르담 성당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 파리의 납작한 거리, 잿빛 하늘 그리고 우글거리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신이 만들었다는 세상에서, 세상없이 존재하는 신의 영역도 없다는, 시간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그 맛에 성당을 순례하는 여행자들도 한둘이 아니다.
멋대로 추천, 유럽의 10대 성당
러시아 모스크바 성 바실리 대성당
성 바실리아 대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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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성당.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인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 칸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며 봉헌한 성당이다. 1555년 건축을 시작하여 불과 5년 만인 1560년 완공했다. 러시아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Arild Vagen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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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스탄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Hagia Sophia
537년부터 1453년까지는 그리스 동방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던 대성당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점령되었던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해 사용되었다. 그 후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 성전이다가 1935년에 박물관으로 재개장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2017년. 사진 C messier by 위키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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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 알무데나 대성당 Cathedral de Santa María la Real de la Almudena de Madrid
1085년 알폰소 6세가 마드리드를 점령했을 때 중세 이슬람교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스페인 시민 전쟁 이후 1950년까지 방치되다 1993년 봉헌되었다. 뿌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지만 현대에 건축이 완성된 만큼, 특히 대성당 내부 건축은 네오 고딕에서 팝아트 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조를 적용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대성당이다. 안토니오 가우디라는, 스페인의 걸출한 건축가의 영혼이 담긴 건축물이다. 고딕과 아르누보가 조화를 이룬 이 성당은 가우디가 사망한 1926년에 계획의 1/4 정도가 진행 중이었다.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설사 그때 건축을 끝낸다 해도 144년의 건축 기간을 기록하게 된다. 2026는 가우디 사망 100주기 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탈리아 프로렌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가 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사랑하는 성당,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이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라는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돔으로 유명하며, 외부는 하얀색으로 윤곽선을 두른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 판으로 마감했다. 건축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기록된 이 돔은 세계 최초의 팔각형 돔이며, 목재 받침이 없이 지어졌고 그때도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밀라노 대성당
Duomo di Milano
밀라노에 위치한 대성당이다. 밀라노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기초로 도시를 이루고 있다. 5세기경 최초의 성당이 건축되었고 836년에 옆 건축물이 세워졌으나 1075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된 후, 두 건물의 규모와 기능을 합친 대성당으로 재건축 되었다. 최종 완공이 1805년이 이뤄졌으니 로마 가톨릭교회의 건축 시간은 백 년이 기본인 듯하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
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 등이 종교 개혁 운동을 벌이던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도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개혁 운동의 산물이 ‘성공회’다. 이 성당은 영국의 국교이자 영국의 독립적 성공회를 대표하는 영국 성공회 성당이다. 성공회는 영국의 종교 개혁으로 탄생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바티칸을 정점으로 출발, 전 세계 교회가 연결되어 있는 계급적 조직이 아니다. 세계성공회공동체라는 연합 모임이 있을 뿐, 전 세계 165여 개국, 38개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성공회(관구)로 이뤄진 기독교 교파다. 세계 성공회의 정점이 아닌 영국 성공회 성당일 뿐인 것이다. 서울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성당 역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라는 독립된 관구다. 대한성공회의 출발은 1890년 인천을 통해 조선에 입국한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교구에서 보낸 선교사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적으로 강화성당, 진천성당, 내동성당 등 한옥을 닮은 성당들이 있다. 1992년까지 캔터베리 대교구 관할 안에 있던 대한성공회는 1993년 완전 독립했다.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피터 성당 참사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다른, 영국 종교 개혁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고야 말았다. 마침 이 성당 근처에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있다. 두 곳 모두 방문하는 것도 흥미로운 비교 여행이 될 것이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Westminster Cathedral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성당이다. 19세기 후반에 건축가 존 프랜시스 벤틀리에 의해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건립, 1903년 문을 열었고 실내를 최종 완성한 1910년에 봉헌을 완료했다. 약 90m의 시계탑, 붉은색의 화려한 외관이 특징이다.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64m 높이의 웨스트민스터 타워에서는 런던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 성 미카엘 수도원
Le Mont Saint-Michel
서기 708년 오베르 주교는 꿈에 대천사 미카엘을 만난다. 미카엘은 지금의 몽생미셸 지역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오베르는 그러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카엘이 다시 꿈에 나타나 같은 명령을 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세 번째 꿈에 나타난 미카엘은 주교의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구멍을 내 버렸다고 한다(머리카락을 불태웠다는 설도 있다). 화들짝 놀란 주교는 당장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건축은 800년 뒤에 완성되었고 오베르는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그런데 그의 두개골에는 실제로 두 개의 손가락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원은 넓은 갯벌 위에 위치하는데, 시간이나 시선에 따라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이래저래 성 미카엘 수도원은 환상 또는 환각적인 성소임에 틀림 없다.
오스트리아 빈 성 슈테판 대성당
St. Stephen’s Cathedral
1147년에 축성되고 1160년에 완공된 성당이다. 오늘날 현존하는 많은 성당이 그렇듯, 이곳 역시 ‘서기’ 초기에 건축했다 허물어진 옛 성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지었다.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타일로 마감한 형형색색의 지붕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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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쾰른 쾰른 대성당 Koelner Dom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이탈리아 원정 때 가져온 동방 박사 3인의 유골함을 안치하기 위해 1248년부터 고딕 양식으로 짓기 시작, 1880년에 네오 고딕 양식으로 완공했다. 라인 강변 언덕 위에 있으며, 대성당 주변에는 쾰른 중앙역과 호엔촐레른 철교, 루트비히 박물관, 로마 게르만 박물관 등이 있다.
[글 이영근(여행작가) 사진 위키미디어,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2호 (18.11.06)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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