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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쉬었다 가세요, 미술관이 된 여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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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 여관이나 처지 비슷해"

인지도 부족한 '관급' 작가들, 자조적 농담에서 전시 기획

잠깐 쉬었다 갈까?

여관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오해하지 말라. 서울 신문로에 있는 서대문여관은 25일까지 아트페어장으로 변신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 '서대문여관 아트페어'는 청년 작가 총 45명이 1961년 지어진 낡은 2층짜리 유휴 공간의 2~3평 남짓한 방의 모든 벽면, 심지어 화장실까지 회화·설치·미디어아트 등 아기자기한 전시장으로 꾸몄다. 예전엔 분명 주인이 고개 빼꼼히 내밀어 손님을 받았을 카운터 공간까지 살뜰히 활용했다. 최저 1000원부터 최대 200만원까지 저렴하고 번뜩이는 미술품을 구경할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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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여관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문로 서대문여관.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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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지난 4월, 이른바 '관급' 작가들의 자조적 농담에서 비롯됐다. 기획자 전희재(27)씨는 "인지도나 가격 면에서 아직 부족한 작가들의 '우리나 여관이나 처지가 비슷하다'는 얘기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서 "더 큰 무대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차원에서 무료 대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관방이 미술관으로 변신하고 있다. 지난달 서울 영천시장 입구 원룸텔 해담하우스에서 열린 대안적 아트페어 '솔로쇼'처럼, 저렴한 임대료, 공간이 제공하는 친밀성·의외성을 살려 기성 아트페어의 천편일률적 화이트 큐브 구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4일 폐막한 올해 제주아트페어의 주제는 '장소예찬―예술가와 여관'이었다. 샛물골 여관길에 있는 대동호텔, 동성장, 옐로우 게스트하우스에서 열렸다. 침대는 회화를 눕힌 전시대가 되고, TV는 미디어아트로 변모했다. 커튼, 욕조, 변기까지 이용해 일종의 '테마룸'으로 기능하거나, 공간성을 극대화하려 대동호텔 303호 방 안에서 촬영한 15분짜리 영상(박성준)이 출품되기도 했다. 박은희 대표는 "'여관이라 들어가기 좀 그러네'라던 어느 중년 여성 관람객이 3일 연속 전시장을 찾는 걸 봤다"면서 "선입견을 벗겨내는 게 예술의 역할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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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입구, 서울 천연동 원룸텔 건물에서 지난달 열린 아트페어‘솔로쇼’내부(위부터). /정상혁 기자·협동작전


벽이 뚫리고 문이 뜯겨 나간, 거의 허물어진 날 것의 여관 풍경은 자체로 현대미술의 묘한 파격처럼 보인다. 지난해 전시장으로 변신한 서울 창신동 시대여관(1965년 준공)의 경우, 철거를 앞두고 망치로 부숴 둥글게 뚫어낸 시멘트 벽면, 가림막이 사라진 창문 등이 각 방과 야외의 풍경을 서로 잇는 의도찮은 통일적 효과를 자아낸다. 이 때문에 공간이 주제를 형성하기도 한다. 16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언급되지 않을 것들의 흔적'은 쪽방촌 일대에 자리한 이 여관의 성격을 토대로 콘셉트를 '소라'로 정했다. 평생 집을 옮겨다니거나, 혹은 좁은 집에 맞게 성장을 멈춰버리는 소라게를 통해 이곳의 삶을 은유하는 설치작품들이다.

손님은 떠나도 기억은 남는다. 25일까지 11주년 기념전 '여관전설'을 여는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은 여관의 문화적 변신, 즉 문화 숙박을 상징하는 장소. 송고은 큐레이터는 "도시·풍경·기억·여관·통의동 5개의 단어는 사라져간 것의 추상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며 "7인의 전시 참여 작가 모두 혼재된 시간과 장소의 간극에서 사라진 기억과 흔적의 유산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정주 시인 등이 참여한 시 동인지 '시인부락'이 탄생한 역사적 장소답게, 건축 도면과 옛 숙박계 등의 아카이빙 전시도 함께 열린다.

여관방의 미술관화는 전국 확산 추세다. 지난해 금성장·녹수장 두 곳을 리모델링해 만든 제주 산지천갤러리, 여관 딸린 목욕탕 영화장이 탈바꿈한 전북 군산 이당미술관…. 지난 10월 경남 창원의 여관 우신장을 미술 전시장으로 바꾼 설치작가 정진경(38)씨는 "여관의 미술적 변신은 시각의 힘을 통해 과거를 좀 더 현명하게 보존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미성년자 입장 가능.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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