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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 (월)

트럼프가 만든 중·일 밀착···中박람회서 '한국패싱'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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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주도 상하이 수입박람회

‘국가 쇼’ 비난 불구하고 성황 이뤄

일본은 최다인 450개 기업 참여

중·일의 새 파트너십 시대 예고해

한국은 중소기업 위주로 참가해

기술 앞세운 일본에 밀리고 말아

[차이나 인사이트] 한국 소외 느낌 준 중국 수입박람회
지난 5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막한 ‘중국 국제수입박람회(CIIE)’는 미·중 무역전쟁의 산물이다. 피할 수 없는 무역전쟁의 전운이 짙게 감돌던 지난 3월, “이제부터는 중국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겠다”며 그 방안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제기한 게 바로 수입박람회였다. 주최측은 이번 행사에 130여 국가에서 2800개 업체가 참가했다고 밝혔다. ‘중국 시장의 위력을 보여줬다’와 ‘국가 주도의 거대한 선전 쇼에 불과했다’ 는 상반된 평가가 나온다. 중국수입박람회는 우리에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나. 현장을 다녀왔다.

이번 수입박람회 행사의 하나로 개막 하루 전 열렸던 ‘훙차오(虹橋) 미디어&싱크탱크 포럼’ 현장에선 유독 많은 일본 기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동안 중국이 주최하는 회의엔 얼굴 비치기를 꺼렸던 게 일본 언론이다. 한데 이번 포럼에는 무려 29명의 기자가 이름을 올렸다. 5명이 참가한 한국 언론계와 비교할 때 무려 6배 가깝다. 일본 기자가 왜 이리 많지?

중앙일보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국제수입박람회’에는 450여 개 일본 기업이 참가해 중·일 산업 파트너십을 과시했다. ‘스마트 제조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일본 나치(NACHI)사의 로봇을 바라보고 있다(상단 사진). [상하이=한우덕 기자],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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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전시장인 ‘스마트 제조관’을 들렀을 때 풀렸다. 넓은 전시장은 로봇 경연장을 방불케 했다. 곳곳에 전시된 덩치 큰 로봇들이 물건을 나르고, 쇠를 깎는 등의 작업을 시연하고 있었다. 미쓰비시 정밀, 파누크(FANUC), 나치(NACHI) 등 일본 기업들이 대거 눈에 들어왔다. 모두 산업 자동화 분야 정밀기계 제작 업체들이다. 이들이 일제히 로봇을 들고 전시회에 참가했다.

“중국에서만 한 달 약 550~600대의 로봇 설비를 판매합니다. 최근 3년 동안 중국 판매액이 매년 30% 이상씩 늘고 있습니다. 중국 광둥(廣東)성 둥관(東莞)과 장쑤(江蘇)성 장자강(張家港)에 공장을 설립했고, 상하이에 중국 본부도 차렸습니다. 중국에서만큼은 이 분야 세계 최대업체인 ABB를 이겨보자는 게 우리의 비전입니다.”

나치 전시장에서 만난 후양(胡楊) 마케팅 매니저의 설명이다. 그는 “일본 로봇기술에 대한 중국 제조업체의 수요가 지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며 “회사 전체 매출 추이로 볼 때 중국의 성장세가 가장 빠르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중국제조 2025’ 전략의 핵심은 스마트 제조다. 제조업 공장에서 로봇 수요가 늘어나고 있고, 그 중간 과실을 일본 회사가 낚아채고 있는 것이다.

이곳뿐만 아니다. 주요 전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은 눈에 띄는 곳마다 큼지막한 부스를 마련하고 중국 관람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 참가한 일본 기업은 약 450개, 이들의 부스 면적은 무려 2만㎡에 달했다. 국가별로는 최대 규모다.

전시장에서 만난 JETRO 관계자는 “지난 5월 이후 신청하는 회사가 크게 늘어 선별 작업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설명했다. 기업이 달려드니 취재 기자들이 많이 온 건 당연한 일이다. 훙차오 미디어포럼에 일본 기자들이 대거 참석한 이유다.

그렇다면 일본 기업은 왜 그렇게 많이 이번 전시회에 참여했을까? 역시 미·중 무역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과 맞서고 있는 중국, 미국에 ‘우리는 다른 카드도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일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진 결과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번 무역전쟁에서 노리는 건 중국을 ‘글로벌 밸류 체인(GVC)’에서 몰아내려는 것이다”. 스티브 배논 전 미 백악관자문역이 한 말이다. 중국으로 흐르는 기술을 차단해 산업 업그레이드를 막고, 중국 산업발전을 돕는 미국 기업들을 중국에서 빼내겠다는 게 트럼프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중국으로서는 이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기술 파트너가 필요하다. 그게 누굴까? 이번 전시회는 그 질문을 풀 실마리를 제공해줬다는 평가다.

한국 중소기업과 함께 전시회에 참가한 이상일 한국무역협회 중국실장은 “중국과 일본이 새로운 기술 파트너십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며 “일본 기업으로서는 광대한 시장이 부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힘겨운 무역협상을 앞둔 일본 정부 또한 협상 카드를 비축해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중·일 양국이 영토 분쟁으로 촉발된 분쟁을 뒤로하고 최근 정상회담을 가진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 기업 외에도 GE, 지멘스, 듀폰 등의 서방 정밀기계 및 소재 업체가 스마트 제조관을 구성하고 있었다. ‘트럼프의 대중 무역전쟁은 마치 우리와 상관없다’는 듯, 그들은 관객 잡기에만 열중이었다.

자오진(趙瑾) 중국사회과학원 국제무역연구실 주임(교수)은 “상하이는 벌써 제2회 수입박람회 준비에 들어갔다”며 “중국 시장의 비중이 커지면서 수입박람회를 찾는 기업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수입 박람회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글로벌 밸류 체인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 계기였다고 입을 모았다. 박한진 KOTRA 중국본부장은 “일본이 미·중 무역전쟁으로 야기된 GVC의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우리도 새로 짜일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GVC 구조로 볼 때 이번 미·중 무역전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 중 하나다. 중국 수출품에서 차지하는 국가별 부가가치 기여도로 볼 때 한국은 대만,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 이어 4위에 올라 있다.

정지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베이징 대표는 “미국의 대중 무역공세로 중국을 고리로 한 GVC가 일부 끊기기도 하고, 느슨해질 수도 있다”며 “그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박람회가 그 기회를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대중 수출의 70% 안팎을 차지하고 있는 소재 및 중간재 업체들의 저조한 참여가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이번 전시회에 186개 업체가 참여해 참가 기업 숫자만으론 일본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규모도 규모지만, 일본과는 내용이 크게 다르다. 일본은 주로 산업기계, 소재, 자동차 부품 등 제조 분야의 대형 기업 참여가 많았다.

반면 한국은 중소기업 위주로 구성됐고, 대기업은 화장품 등 소비재 분야에 치중했다. 스마트 제조관에 나온 한국 기업은 해저케이블, 무선 전력기술, 에너지 저장장치 등을 선보인 LS가 유일했을 정도였다.

한국 산업은 일본의 기술력과 중국의 가성비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비유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는 중국이 일본을 기술 파트너로 선택함에 따라 아예 샌드위치 처지에서조차 밀려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한국에서 가져갈 기술이 없다면, 중국은 한국 기업에 파트너 하자고 손 내밀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박람회는 중국의 또 다른 ‘한국 패싱’ 현장이었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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