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신두리 해안사구는 국내 190여개 해안사구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잘 닦인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사막과 초원 풍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그림처럼 펼쳐진 바다 풍경은 덤이다.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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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백사장의 모래알이 쓸려 뒹군다. 모래는 육지 방향으로 계속 굴러가 쌓인다. 쌓인 모래는 어느덧 커다란 언덕을 이룬다. 바람은 사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제 일을 한다. 모래언덕은 점점 커진다. 둔덕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그렇게 모래 한 알, 한 알이 모여 이룬 거대한 풍경이 바로 충남 태안군 신두리 해안사구다.
■ “산이 움직인다”
해안사구는 바람과 모래, 언덕을 형성할 해변 공간 등 세 요소가 갖춰져야 만들어진다. 겨울이면 북서 계절풍이 부는 서해는 사구 형성에 좋은 조건을 가졌다. 국내 190여개 해안사구의 절반이 충남과 전남 등 서해안에 몰려 있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모래 벌판은 한동안 공사용 트럭이 마구잡이로 모래를 퍼나르는 등 훼손이 심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신두리의 사막 지형이 관심을 받으며 2001년 천연기념물(431호)로 지정됐다. 빙하기 이후 1만5000여년 전부터 조금씩 형성된 사구(沙丘)가 그제야 지형적 특성과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국립생태원 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해안사구 면적은 해방 즈음과 비교해 30% 이상 줄었다. 집과 도로, 상업시설에 해변이 점령당한 탓이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모래와 시간이 빚어낸 원형의 바닷가를 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장소이기도 하다.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지금도 복원과 보존 작업이 한창인 신두리 해안사구를 걸었다. 한낮의 구름 사이로 해가 왔다갔다 했다. 사구를 형성한 모래는 입자가 가늘고 균일해 배수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수분을 머금은 모래언덕은 햇빛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빛깔을 뽐냈다.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모래바람이 휘돌아나가며 땅에 새긴 색의 무늬가 다채로웠다. 동네 사람들이 “사구의 풍경이 계속 변한다. 산이 움직인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인가 싶었다. 실제로 사구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계속 변신 중이다. 최고 19m라던 모래언덕 최고 높이는 현재 11m까지 낮아졌다. 내년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해안사구의 재료가 되는 모래경단.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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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변화하는 사구를 더 활기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다양한 사구 식물들이다. 한약재로도 쓰이는 갯방풍, 연보랏빛 나팔꽃을 닮은 갯메꽃, 모래땅 위에 뾰족한 이삭을 드러낸 갯쇠보리 등 앞에 ‘갯’자가 붙은 것들은 모두 해안사구에서 흔히 관찰되는 종이다. 갯그령은 염분과 바람에 강해 바다 쪽으로도 뿌리를 뻗는 키 큰 풀인데, 바다와 해안사구를 가르는 기준 역할을 한다. 7~9월에 보라색 꽃을 피우는 순비기나무의 열매에선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과거 임금님의 목욕 때 욕조에 넣었던 풀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구 뒤쪽으로는 커다란 곰솔숲이 펼쳐져 있다. 분위기가 아늑해 사구 쪽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있었다. 주로 바닷가에 분포해 해송이라고도 불리는 곰솔은 잎이 곰의 털처럼 거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장자리의 한 소나무는 딛고 선 모래땅이 바람에 흩어져 사방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뿌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강한 바닷바람을 견디며 모래 위에서 버티기 위해 뿌리줄기가 길게 발달한다는 사구 식물 특성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사구 보호를 위해 나무데크로 길게 깐 탐방로는 혼자 걷기 좋았다. 모래와 풀이 번갈아 시야를 꽉 채우니 사막과 초원을 연달아 걷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를 옆에 품은 풍경 자체도 물론 빼어났다. 일주일에 10여팀씩 웨딩촬영을 하러 온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바다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은 언덕배기에 이르자 해변으로 좁은 내리막길이 나 있고 길섶엔 갯그령이 그득했다. 동행한 안경호 생태해설사(63)가 밤에 가끔 찾는 길이라고 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갯그령이 춤추는 모습이 황홀경을 연출하는데 여길 걸으면 꼭 내가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1만5000년 전부터 형성된 사구
2001년에야 천연기념물로 지정
현재도 복원과 보존 작업 한창
다양한 식물들 끈질긴 생명력
사막과 초원이 어우러진 풍경
방포항 모감주나무 군락지와
할미·할아비 바위 전설 깃든
일몰 명소 꽃지해변도 눈길
신두리 해안사구엔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을 비롯해 다양한 곤충과 동물이 터전을 꾸리고 있다. 모래에 동그란 홈을 파놓고 거기 빠진 개미를 잡아먹는 ‘개미귀신’은 어린이들이 늘 찾아 헤매는 벌레다. 밤이면 모래언덕을 찾은 고라니가 발자국을 남기고, 그 고라니를 잡아먹은 삵도 먹이활동의 흔적을 남기곤 한다. 사구를 벗어나 백사장에 가까이 가자 작은 알 모양으로 한 움큼씩 쌓인 ‘모래경단’이 눈에 띄었다. 엽낭게와 달랑게가 모래를 삼켜 플랑크톤이나 유기물을 걸러 먹고 뱉어낸 흔적이다. 몸길이 1~2㎝에 불과한 게들이 남긴 이 ‘음식쓰레기’조차 바람에 날려 다시 해안사구를 형성하는 재료가 된다는 설명에 감탄이 나왔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을 걸으며 여기저기 수북한 모래경단을 피해 가느라 발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길이 3.4㎞, 폭 0.5~1.3㎞에 이른다. 사구를 둘러볼 수 있는 탐방로는 세 코스로 나뉘는데 각각 30분에서 2시간까지 걸린다. 입구 부근의 신두리사구센터엔 해안사구의 생성과정과 생태계를 보여주는 영상물과 각종 전시실이 있어 먼저 들르면 좋다. 사구 뒤편에 자리한 두웅습지도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전형적인 사구 배후습지로 한국 고유종인 금개구리와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백로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다. 습지 둘레길을 도는 데 15분이면 충분하다.
꽃지 해변 할미·할아비 바위 사이로 지는 해. 꽃지의 일몰은 ‘서해 3대 낙조’로 꼽힌다. 태안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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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미·할아비 바위 사이의 일몰
신두리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쯤 달려 안면도로 향하면 또 다른 천연기념물을 만날 수 있다. 방포항에 바로 붙어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다. 모감주나무는 우환을 없애준다는 뜻의 ‘무환자(無患子)나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백화원 초대소 정원에 심으면서 최근 유명해지기도 했다. 모감주나무는 ‘번영’이라는 나무말과 ‘자유로운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여름이면 노란색 꽃이 온 나무를 덮을 정도로 화려하게 만개하는 모감주나무의 영어 이름은 ‘골든 레인 트리(Golden Rain Tree)’다. 매년 6월 말 장마철이 다가오면 방포항 주변은 황금비가 내리는 듯 노란 물결을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꽃 떨어지고 가을이 되면 꽈리 모양의 씨방 안에 까맣고 빛나는 열매가 열린다. 태우면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그 열매가 염주를 만드는 데 사용돼 모감주나무는 염주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가을도 물러갈 준비가 한창인 11월에 찾은 모감주나무는 몇 안 되는 열매를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고 있었다. 그래도 선비목·학사목으로 불리는 나무답게 가지가 휘어져 뻗은 자태가 기품 있었다. 500여그루가 자라던 군락지엔 2010년 여름 태풍 ‘곤파스’의 타격으로 200여그루가 스러졌다가 지금은 400여그루까지 개체수가 늘었다. 키가 2~3m 되는 나무 수백그루가 120m에 걸쳐 길게 뻗은 모습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심어 화제가 됐던 모감주나무. 김형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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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감주나무 군락지에서 방포항을 거쳐 바닷가로 나오면 바로 꽃지해변이다. 해변 앞에 보이는 할미·할아비 바위는 아름다운 경관 덕에 2009년 명승(69호)으로 지정됐다. 바위엔 전설이 있다. 1200여년 전인 신라 덕흥왕 시절 해상왕 장보고의 부하였던 ‘승언’이라는 인물이 출정 명령을 받았다. 금실 좋던 아내 ‘미도’에게 곧 돌아온다 하고 떠났으나 승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던 미도는 한을 풀지 못한 채 숨을 거뒀고, 미도가 앉았던 산은 바위로 변했다. 그 할미바위 옆에 어느 날 솟아오른 게 할아비바위다. 그 애끊는 사연에 누군가 감정이입을 한 것일까.
태안군 이광훈 문화관광해설사(65)는 “어떤 간절한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1970년대까지 할미바위 정상엔 누군가를 모신 묘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지금 할미·할아비 바위엔 곰솔이 바위틈마다 자리를 틀고 있다. 만조 때 물이 들면 바위는 두 개의 섬이지만 썰물이 되면 육지까지 연결돼 가까이서 세월에 삭은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두 바위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은 꽃지를 태안의 명소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계절 가리지 않고 평일에도 낙조 때면 커다란 사진기로 무장한 이들이 20~30명씩 몰린다. 여름보다는 겨울이 해 지는 시각도 빠르고 위치도 좋아 노을 촬영에 유리하다. 방포해수욕장 쪽에선 바닷물이 온통 붉게 물드는 장관을 촬영할 수 있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산에 자리 잡은 방포전망대는 바위는 물론 꽃지해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다.
경향신문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천연기념물과 명승지를 찾아갑니다. 국가 지정 문화재인 천연기념물은 동물·식물·지질·보호구역 등 459건에 이릅니다. 경관이 뛰어난 명승도 111곳이나 됩니다(2018년 9월 기준). 이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특별한 매력이 있는 곳을 골라 소개하려 합니다.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해당 문화재에 담긴 역사와 문화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도 전할 계획입니다. 우리 자연유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도 적극 소개하며 든든한 국내 여행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코너 제목인 비경성시는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 혹은 남이 모르는 곳이란 뜻의 ‘비경’(秘境)과 사람이 붐빈다는 뜻의 ‘성시’(成市)를 합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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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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