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구좌 당근밭
한겨울, 제주 서귀포시에 귤밭이 있다면 제주시 구좌읍엔 초록빛을 뽐내는 당근밭이 있다. 구좌 당근밭은 본격적인 수확을 앞둔 12월 초·중순이 가장 예쁠 때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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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 제주에 간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제주시 구좌읍 당근밭이다. 만물이 기운을 잃는 이 무렵 당근밭에서는 '초록 반란'이 일어난다. 매년 겨울, 동쪽 제주를 푸르게 물들이는 일등공신이다. 까만 화산석 밭담(제주에서 밭의 가장자리를 돌로 쌓은 둑) 너머 보이는 초록의 당근밭. 지금, 만나러 갈 때다.
한겨울 '제주도의 푸른 밭'
"무슨 밭이기에 아직도 이렇게 푸릇푸릇해요?"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일차선 도로에 붙은 한 밭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올레길 투어를 하던 50대 남성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무성한 풀만 위로 내뻗었을 뿐 뿌리는 흙 속에 잠복하고 있으니 육지 사람들은 정체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은, 당근밭이다. 구좌읍 월정리에서 30여 년 당근 농사를 짓고 있다는 정윤정(67) 성산일출봉농협 이사는 "수확 전엔 밭 지나는 외지인마다 '무슨 채소냐'고 묻는 통에 대답해주기 바쁘다"며 웃었다.
매끈한 '세척 당근'이나 잎이 싹둑 잘린 '흙 당근'만 보아온 도시인에게 당근밭의 모습은 '반전'이다. 강렬한 주황색 뿌리 위로 무성한 초록 잎을 자랑한다. 밭담 너머 목을 쭉 빼 자세히 보면 무성한 잎이 군락을 이뤄 마치 작은 숲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제주에만 이런 당근밭이 1400㏊에 이른다. 이태길(43) 구좌농협 본점 판매팀 과장은 "한때 재배 면적이 2400㏊에 달했지만, 당근 재배 농가의 고령화와 당근 대신 무 농사를 택하는 귀농인이 늘면서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제주 당근은 현재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7월 말~8월 초에 파종해 11월 말부터 수확한다. 조금 늦게 파종한 것은 1~2월, 그보다 더 늦으면 3월에 뽑기도 한다. 한파가 닥치고 눈이 내려도 월동채소인 당근은 푸른 잎만 내어 놓고 흙 속에서 꾸준히 몸을 키운다. 뿌리는 수확 전까진 모양도, 크기도 알 수 없다. 한번 뽑은 당근은 못생기거나 씨알이 작아 상품 가치가 떨어져도 다시 심을 순 없다. 뽑으면 그만이다.
오랫동안 당근을 재배해온 농민들은 줄기와 잎을 보고 작황을 어림짐작한다. "대개 줄기가 굵고 잎은 진초록빛을 띤 것이 상품이 좋아요. 크기가 너무 굵지 않고 길이는 15~20㎝ 정도로 가느다란 당근이 맛있습니다. 푸성귀가 귀한 겨울에 당근잎을 볶아 먹거나 미나리나물처럼 무쳐 먹기도 했죠. 씁쓸한 향이 미나리와 비슷해서 입맛 살리기 좋습니다." 이 과장은 "올해는 기록적인 폭염과 태풍으로 파종과 발아가 늦어져 수확 시기도 예년보다 많이 밀렸다"며 "생산량이 평년보다 20~30% 정도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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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봉 오르면 푸른 밭 한눈에, 당근 농가에선 수확 체험도
제주의 사계(四季)에서 당근은 청보리, 유채꽃, 메밀꽃, 감귤처럼 떠들썩하게 축제를 할 만큼의 특별한 작물이 아니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푸른 당근밭은 제주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밭담과 어우러져 구좌 여행에 맛을 더한다. 당근 특화 지역인 제주시 구좌읍 12개 리(里)와 서귀포시 성산읍 일대에 당근밭이 몰려 있다.
올레길 중에선 성산읍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광치기해변에 이르는 올레길 1코스가 당근밭과 조우하기 좋은 코스로 꼽힌다. 1코스 초입의 시흥초등학교 주변부터 당근밭이다. 마을이나 도로를 따라 걷다가 유난히 포슬포슬한 풀밭을 목격한다면 아마도 당근밭일 것이다.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와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걸쳐 있는 두산봉(말미오름)에 올라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서면 이 푸른 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경계선처럼 보이는 까만 줄의 밭담을 기준으로 짙은 푸른색은 당근밭, 조금 연한 푸른색은 무밭이다. 두산봉에서는 억새, 푸른 밭, 제주 동쪽 바다와 성산일출봉을 한 시야에 담을 수 있다.
갓 수확한 당근을 맛보는 것도 구좌 여행의 즐거움이다. 구좌읍 송당리 제주로의농부여행에선 당근 수확 철에 유기농 당근 수확 체험을 진행한다. 귀농인인 유도균(54) 대표는 "당근은 한꺼번에 수확해 판매하기 때문에 수확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드물다"며 "유기농 당근 홍보 차원에서 몇 년 전부터 수확 철에 맞춰 한시적으로 체험객을 받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12월 20일쯤부터 진행할 계획이다. 1인당 1만원을 내면 당근 수확을 체험한 뒤 그 당근으로 만든 유기농 당근주스를 맛볼 수 있다. '비창'이라는 도구를 당근 가까이 찔러 줄기를 잡아당기면서 뽑는 방식이 생각만큼 쉽진 않다. 잘못 찔러 '파지(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가 생기기 일쑤다. 체험으로 생긴 일부 파지는 체험객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농장 방문객에겐 유기농 당근도 좀 더 저렴하게 판매한다.
매달 '5, 0'으로 끝나는 날에 구좌읍 세화리 해변도로 인근에서 열리는 세화민속오일시장에선 12월부터 갓 수확한 당근들이 나온다. 장날이면 재배 농가마다 수확한 당근을 들고 나와 난전을 펼친다. 인파에 섞여 구경 실컷 하다 밖으로 나오면 에메랄드빛 세화리 바다가 손님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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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빙수부터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까지… 햇당근의 화려한 변신
당근은 '비타민A의 황제'로 불린다.구좌읍엔 당근을 테마로 한 카페가 많다. 당근이 나지 않는 시기엔 저장 당근을 쓰기도 하지만 당근 수확 철이 되면 햇당근을 활용한 메뉴를 선보인다. 구좌읍 종달리 카페동네는 당근빙수(1만2000원)가 맛있다. 향이 진한 당근즙에 연유, 우유 등을 섞어 얼린 다음 눈꽃빙수처럼 곱게 갈고 견과류를 뿌려 낸다. 향이 강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고소하다. 뒷맛이 개운한 것도 당근의 힘. 당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부감 없이 먹을 만하다. 주인 박경희(40)씨는 "5년 전 문을 열 땐 당근 수확 철에만 팔았는데 찾는 사람이 많아 연중 판매하게 됐다"고 했다. 바로 즙을 내려주는 당근 주스(6000원)도 향이 진하다. 창가에 앉으면 제주의 소박한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구좌 당근을 주재료로 한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카페동네’의 당근빙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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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숙소 겸 복합문화공간 비젠빌리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건축가, 포토그래퍼이기도 한 '닷투디자인' 최정훈(40) 대표가 직접 꾸미고 운영한다. 당근밭 한가운데 야외 수영장을 중심으로 숙소, 레스토랑 겸 카페, 편집숍, 사진 스튜디오가 모여 있다. 카페 '비어라운드'에선 당근밭을 감상하며 당근 주스, 케이크 등을 맛볼 수 있다. 당근이 한창인 지금은 '당근밭 포토존'이 인기다. 제주도의 푸른 밭 사진을 찍고 싶다면 수확하기 전에 들르시길.
겨울엔 따뜻한 수프 한 그릇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북카페 풍미독서는 샐러드, 통새우버거와 함께 생크림을 넣어 부드럽게 끓여낸 오늘의 수프(5000원)가 일품이다. 그 중 구좌당근수프는 곁가지로 주문했다가 "한 그릇 더!"를 외치게 한다는 그 메뉴다. 당근 케이크 맛집은 여럿 있다. 구좌읍 월정리 해변가 구좌상회는 2017년 당근 케이크(7000원)로 방송에 나오며 더 유명해졌다. 당근은 씹히지만 당근 맛이 과하지 않고 크림치즈는 꾸덕하나 겉돌지 않는 게 이 집 당근 케이크의 매력. 견과류는 고소함을 더할 뿐이다.
구좌 당근을 테마로 한 구좌읍 평대리 ‘카페 캐로타’<왼쪽>와 캐로타의 당근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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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구좌농협하나로마트 중부지점 옆엔 구좌 당근을 테마로 한 아담한 카페 카페 캐로타가 문 열었다. 베이커리 전문 브랜드 '올리버스윗'과 손잡고 당근을 가미한 캐롯 마들렌(2500원), 캐롯 케이크 컵(7000원), 캐롯 피클 핫도그(8000원) 등 다양한 당근 메뉴를 판매한다.
[제주=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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