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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기교가 기교를 낳는 지경” vs “변별력 위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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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수능 국어영역 국어교육과 교수 8명 진단

“부적절했다” vs “낼 만한 문제”

문제 적절성 놓고 의견 엇갈려

“수능 출제경향 점검할 때 됐다”

평가방법 개선에는 한 목소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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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치러진 지 보름이 지났지만 ‘국어영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어 실력이 아닌 멘탈(정신력) 시험이었다”는 수험생, 1교시 국어영역 시험 뒤 너무 많은 학생들이 울어 안타까웠다는 시험 감독관, “시험 지문을 읽고 화가 났다”는 고등학교 교사 등의 목소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전해졌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지난 26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하 평가원)은 국어영역 시험 중 한 문항(31번 문제)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수능 국어영역은 1교시인 오전 8시40분부터 10시까지 80분동안 시험지 16장(올해 기준), 45문항을 풀어야 한다. 이번 국어영역에서 수험생들이 이의신청한 문항은 19개다. 전체 문항의 42%에 대해 수험생들이 이의를 제기한 셈이다. 정답만이 아니라 문제 자체가 이상하다고 논란이 일었던 문항은 11번, 31번, 42번이다.

11번 문제는 ‘최소대립쌍을 이용해 음운들을 추출하면 음운 체계를 수립할 수 있다’는 설명을 바탕으로 한 문법 문제다. 가장 논란이 컸던 31번 문항은 만유인력과 관련한 과학 지문을 바탕으로 ‘밀도가 균질한 하나의 행성을 구성하는 동심의 구 껍질들이 같은 두께일 때, 하나의 구 껍질이 태양을 당기는 만유인력은 그 구 껍질의 반지름이 클수록 커지겠군’과 같은 문장을 썼다. 논리학 지문을 제시한 42번은 “가능세계의 포괄성과 독립성에 따르면, ‘어떤 학생도 연필을 쓰지 않는다’가 성립하면서 그 세계에 속한 한 명의 학생이 연필을 쓰는 가능세계들이 존재하고, 그 세계들의 시간과 공간은 서로 단절되어 있겠군”이란 문장이 인용됐다.

<한겨레>는 국어 교육 분야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전국의 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들에게 이번 국어영역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다. 전문가 집단 안에서 이해관계가 얽힐 수 있어 답변은 익명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8명의 교수가 답변을 보내왔다. 국어교육학과 교수들에게 던진 질문은 이번 국어영역에서 논란이 된 문항들이 ‘출제할만한 문제들’이라고 생각하는 지와 그렇게 생각한 이유, 국어 시험 출제 경향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개선방향 등이었다.

응답을 보내온 국어교육과 교수들은 세부 평가에 대해서는 입장이 엇갈렸지만 앞으로 국어 교육과 평가 방식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수능 국어영역 논란을 단순히 수험생들의 하소연으로 넘기지 않고 ‘수능 국어영역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답변을 주제별로 간추려 싣는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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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 문제 등 적절했나

두 명의 교수(ㄱ교수, ㄴ교수)가 “적절하지 않은 문제들이다”라고 응답한 뒤 강도 높은 비판의 글을 보내왔다. “좋은 문제들”이라고 답한 교수는 한 명도 없었고 “어렵기는 하지만 낼 만한 문제들이다”라고 응답한 교수는 4명(ㄹ교수, ㅁ교수, ㅂ교수, ㅇ교수)이었다. 나머지 두 명의 교수(ㄷ교수, ㅅ교수)는 조건부로 비판적인 의견을 보내왔다.



“부적절했다. 31번 문제는 유달리 ‘외계어’와 같은 식으로 기술되어 있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성채와 같다는 느낌이었다. 기존의 과학·기술 분야 지문에서는 그래도 글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수능에서 지문은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항은 그 지문을 제대로 읽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의 과학(31번)과 철학(39~42번) 지문은 과연 그런 가치를 갖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만일 지문이 그렇지 못하다면 이를 문항으로라도 실현을 했어야 한다. 답이 틀려도 정답을 확인할 때 ‘아하!’ 하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이번의 두 지문과 문항은, 지문을 위한 지문, 문항을 위한 문항이 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답을 잘 맞힌 수험생들이라고 하더라도 문항을 풀고서 과연 어떤 보람을 느꼈을까 하고 회의적인 생각이 들 뿐이다.”(ㄱ교수)

“이번에 문제가 된 문항들은 그 출제 의도에 있어서는 타당성이 있다. 수능은 기본적으로 사고능력(이해능력, 분석능력, 추리능력, 비판능력, 적용능력 등)을 측정하자는 것이고, 이번에 문제된 문항들은 이 능력들에 복합적으로 관련되는 것들이라고 본다. 하지만 난이도란 조금만 문항에 변화를 가하면 급격히 오르내리는 민감한 것이다. 수험생이 제한된 시간에 처리해야 할 정보량을 많이 주면 어렵게 되고, 적게 주면 쉽게 된다. 내용이 까다롭거나 답지 5개와 주어진 지문 전체 내용을 일일이 대조해야 풀 수 있는 거라면 더 어려워진다. 이번에 문제가 된 만유인력 지문처럼 추가 지문을 주고, 내용조차 까다롭거나 용어가 낯설다면 난해한 문항이 된다. 학력고사를 대체한 현 수능 체제가 지속된 지도 20년 이상이 됐다. 학력고사보다는 사고력 위주의 측정을 하기 때문에 중등학교 교실 교육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초창기의 평가는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수능 국어영역의 출제 기법은 이제 매너리즘에 빠져서 기교가 기교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ㄴ교수)

“31번 문제의 적절성은 학생들이 ‘과학 시간’에 이 주제와 관련된 배경 지식을 ‘공통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만약 과학 시간에 이와 관련된 배경 지식(질점, 부피요소 등)을 모든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이 문제는 까다롭기는 하지만 부적절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문항은 유·불리 차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42번의 논리학 지문도 모든 학생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능력을 고등학교 정상 교육과정에서 익히지 못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ㄷ교수)

“현 교육과정의 목표를 사고 능력 증진 쪽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낼 만한 문제들이라고 보지만 지문 해석 능력을 증진할 수 있는 문항이 아니었단 점에서 안타깝다.(ㄹ교수)

“11번은 난도 높은 문항이다. 학생들이 당황했을 수 있다. 못 풀었으면 넘어가야 한다. 31번 문항과 같은 과학기술 지문은 언제나 문과생들보다 이과생들에게 유리한 문항이다. 39-42번의 논리철학 지문의 언어가 우리말스럽지 않은 언어이긴 하지만 논리철학의 언어가 그러하다. 학생들은 아름다운 우리말에도 노출되지만 각 학문분과의 언어에도 노출된다. 그래서 어려웠지만 출제 가능한 문제들이라고 생각한다.”(ㅁ교수)

“이번 국어시험이 문제로서 기본은 갖추었다는 입장이다. 문제가 된 문항들이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 여부를 측정하면서 동시에 당락을 가를 수 있는 변별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삼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난이도가 높기는 하지만 국어과의 교육과정, 목표에서 벗어난 출제도 아니다. 미래사회를 위해서라도 독서경험이 풍부하고 융복합적 지식을 갖춘 학생에게 유리한 출제가 요구된다고 본다.” (ㅂ교수)



이런 문제를 낼 수밖에 없나?

학생들이 울음을 떠뜨릴 정도로 난해한 문제들이 수능에 나오는 이유로는 주로 ‘변별력’이 꼽힌다. 대학 입시에 수능 점수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줄세우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몇 문항은 어렵게 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번 국어영역이 낼만한 문제들이었다고 응답한 교수들도 ‘변별력’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한 교수(ㄴ교수)는 현재 대학입시가 처해있는 현실 전체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가 많긴 하지만 경쟁과 변별력, 객관성의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다른 대안이 거의 없을 듯 하다.”(ㅅ교수)

“출제 현장에서는 많은 이유로 변별도와 난이도 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가 있다. 과거 출제 경험이 있는 위원들과 처음 출제하는 위원들로 출제진이 구성되어 제한된 시간(2주 미만)에 출제하는 현행 시스템은, 그 출제진들이 모두 수능 이전의 모의평가 출제진들이라 해도 항상 난이도 조절과 변별도 조절에 실패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더구나 지금처럼 모든 과목이 수능 과목이 된 상황, 국어영역도 모든 하위 영역이 수능 평가 영역이 된 상황에서 난이도와 변별도를 통제할 경황이 집행부에 있을 수 없다. 현 수능 출제 체제는 거대한 분량의 문항을 대규모 출제진이 고립된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만들어내야 하는, 기묘한 공장 체제, 그것도 기계화된 공장이 아니라 수공업 체제의 공장 체제와 같다. 여기에 정교한 난이도와 변별도 조정 시스템이 있을 수 없다.

수능의 변별도와 난이도 문제는 근본적으로 대학의 요구와 중등교육 현장의 현실 사이의 길항 속에서 발생한다. 대학, 특히 소위 상위권 대학들은 변별도를 요구하고, 그것에 대한 불만으로 지금의 수시 논술을 실시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고등학교들의 수준과 대학의 요구 사이를 균형 있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더구나 고등학교와 대학 사이에 수능 출제권은 정부가 쥐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학생의 성적 정보의 주요 부분을 정부가 측정하여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정부, 이 셋이 벌이는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대학은 불만을 표시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어떤 시험이고 과정이든 본인에게 유리하게만 하려고 한다. 거기에 사교육비라는 괴물이 등장하여 정치·경제 문제로 자리를 잡았고, 이제는 교육의 본질이나 방향보다 사교육비가 제일 큰 이슈가 되었다. 그것을 수능과 관련하여 해결하는 방안이 처음에는 이른바 ‘물수능’화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대학과 학교 현장의 반발이 있으면 ‘불수능’이 등장한다. 그 다음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고금천지에 희한한 ‘EBS 연계 출제’다. 그 결과 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교과서 대신, 수준이 의심스러운 EBS 교재를 설명하게 됐다. EBS 교재에 나온 문항을 변형하여 출제하라는 것은, 패턴화된 문항을 내라는 것이고, 그것은 패턴화된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다. 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ㄴ교수)



대안은 무엇일까

31번 문항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지만, 답변을 준 대부분의 교수들은 20년이 넘게 유지되어오며 ‘사고력을 측정한다’던 애초 취지가 무색하게 변질된 수능의 출제 경향에 대해 다시 점검할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수능 시험 평가가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고 국민 다수가 선호하는 평가방법으로 용인되고 있지만, 정작 어떤 국어능력을 평가하고자 하고, 졸업 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국어사용능력이 과연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분명 잘못된 평가방법이다. 문제풀기를 위한 국어교육,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을 측정하는 현행 수능평가 방법(선택형 일변도)을 바꿔야 한다. 국어영역 중에서도 특히 문학 영역은 다른 영역과 다른 방법으로 평가해야 한다. 국어능력평가 방법에 대해 장기간 국가 프로젝트로 연구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객관성과 다양한 능력 평가방법이 결합된 문항개발 말이다.”(ㅇ교수)

“듣기 평가까지 없어져 현재의 수능 국어영역은 사실 ‘읽기’ 문항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모두 읽고 푼다. 그러니까 사실은 ‘독서’와 ‘문학’ 문제들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과학 지문이든, 논리학 지문이든, 문법 지문이든 모두 측정하고자 하는 능력은 이해력, 분석력, 추리력 등이다. 이 점에서 텍스트 내용이 중요한가, 사고 능력이 중요한가를 수능 국어영역 시험은 진지하게 따져야 한다. 수능에 안 나오면 수업이 안 되는 현실때문에 수능이 하위 과목들의 내용 영역 학습 여부의 측정 도구로 변질됐고 이 때문에 내용이 까다로운 텍스트를 바탕으로 고등 사고 능력을 측정하는 문항은 내면, 소위 ‘킬러 문항’이 등장하는 것이다. 수능 국어 과목은 사고 능력 측정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모든 학문 영역이나 교과 영역을 다 망라하는 문항들의 안배 체제를 탈피해야 한다. 즉 문항을 기초 이해력, 분석력, 비판력, 추리력, 적용력 평가 등으로 범주화하고 위계화하면 난이도 조절도 한층 용이하고, 수험생의 사고 능력 평가도 전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ㄴ교수)

“세상에 완벽한 시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어 내년에는 다시 ‘물수능’으로 변질된다면 그때가서 또 난리가 날 것이다. ‘불수능’이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쪽으로 비판이 따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사람이 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상식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된다.”(ㅂ교수)

“‘불수능’은 학생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게 되고, 사교육시장 성장의 빌미가 된다. 기본적으로 수능을 너무 어렵게 내는 것에 반대한다. 적정 수준이 좋다. 이걸 늘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수능에 서술형이나 논술형을 일부 포함하는 것을 지지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또 사교육에 내몰릴까봐 이렇게 주장할 수도 없다.”(ㅁ교수)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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