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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차이나 인사이트] 중국에서 남부 도읍은 통일 국가 포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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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수도는 300여 개

100년 이상 도읍은 7곳 불과해

북송까지 수도는 동서 배회 양상

운하 생기며 남북 배회로 바뀌어

남부 지역 도읍은 전국 통치 포기

중원 통제 베이징이 수도론 최적

중국은 어떻게 수도를 정했나

중국 역사상 수도 또는 보조 수도는 300여 개에 이른다. 수도가 많았다는 건 천도(遷都)가 빈번했음을 뜻한다. 잦은 천도는 장구한 역사 및 광대한 역사에서 비롯되지만, 조대(朝代)마다 천도할 수밖에 없었던 격변의 역사가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300여 수도 중 100년 이상의 수도는 시안(西安)과 뤄양(洛陽), 카이펑(開封),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등 7개에 불과하다. 중국은 어떻게 수도를 정해왔나? 또 수도 변천엔 어떤 규율이 작용했나?

수도는 국도(國都)로 불리는 만큼 국가의 권위와 지향성이 담겼다. 수도엔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전국 통치가 가능한 중앙의 위치인가, 경제와 국방에 충분한 인적 자원의 유입이 가능한가, 주변 평야로부터 충분한 식량 공급이 이뤄지나, 외부의 공격차단에 유리한 지형인가 등이 고려된다.

또 원활한 수륙 교통, 풍부한 수자원, 적합한 기후, 심지어 풍수설에 근거한 왕기(王氣) 여부도 살펴야 했다. 이 중에서도 중요한 건 국방 안전과 민생 안정의 두 요소다. 외환(外患)이 심각하면 전략적 지형을 우선 따졌고, 식량이 부족하면 비옥한 평야를 먼저 고려했다.

한데 이 과정엔 두 개의 모순이 존재했다. 하나는 외환의 지역이 고정되지 않고 서북에서 동북으로 옮겨간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수도 인구의 급증으로 늘 식량부족 문제가 야기된다는 점이다. 천도는 국가의 급변 상황에 대한 적극적 대응 방안의 하나였다. 이게 잦은 천도의 원인이다.

중앙일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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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기본 조건인 국방과 경제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여서 국방 차원의 천도는 경제적 약점을 초래하고, 경제적 천도는 국방 위기를 부르기 마련이다. 양한(兩漢)이 대표적 예다. 흉노 등 외환에 시달렸던 서한(西漢)은 관중(關中)의 시안에 도읍했지만, 식량부족 상황에 직면했다. 반면 식량문제로 중원(中原)의 뤄양으로 천도한 동한(東漢)은 국방이 취약해 삼국(三國)의 할거시대를 열었다.

이후 시안으로의 재천도는 수당(隋唐)이 국방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배경엔 대규모 물류 공급을 가능케 한 운하가 있었다. 운하는 중국 도시의 대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수도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됐고 수도 이전은 난징과 베이징을 오가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수도 변천엔 세 개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동서 배회의 횡렬(橫列) 양상이다. 진한(秦漢)에서 북송(北宋)까지의 시기로 모든 수도가 관중과 중원을 오가고 있다. 셴양(咸陽)과 시안은 서쪽인 관중, 뤄양과 카이펑은 동쪽인 중원에 자리해 동서 배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즉 시안(秦, 漢)→뤄양(東漢, 魏, 西晉)→시안(唐)→카이펑(北宋)으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건 시안과 뤄양은 365㎞, 뤄양과 카이펑은 195㎞ 거리로 떨어져 있다. 한데 세 도시의 위도 차이는 1도가 안 된다. 거의 일직선에 있다. 수도가 내내 일직선 상에서 움직인 셈이다.

이러한 동서 이동은 중국 지형의 서고동저(西高東低) 현상에서 기인한다. 서쪽이 높고 동쪽은 낮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모두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거마(車馬)가 주요 운송 수단이었던 당시로선 동서 교통이 활발했지만 남북 교류는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런 정체 상황은 운하의 개통으로 끝나고 중국엔 동서남북이 연결된 교통 체계가 완성된다.

이에 따라 수도 변천의 두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남송(南宋)부터 현재까지로 모든 수도가 장강과 황하를 오르내리는 남북 배회의 종렬(縱列)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여진족에 의해 카이펑이 함락되자 난징에서 남송이 선포됐다. 10년 후 황제는 돌연 250Km 남쪽의 항저우에 정착했으나 결국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원(元)은 베이징에 도읍하면서 베이징 수도시대를 열었다. 앞서 금(金)나라에서 시작된 베이징 도읍 결정은 금과 원, 청(淸)의 중국 공략에 대한 강한 의지의 표출이다. 명(明)의 주원장(朱元璋)이 난징에 도읍했지만, 영락제(永樂帝)의 정권 장악으로 베이징 수도의 전통은 이어지며 현재의 신중국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국민정부 시절 잠시 난징 도읍이 있어 외관상 베이징과 난징을 오가는 남북 배회의 양상을 보이지만 난징 수도 기간이 매우 짧았던 데 비해 베이징은 이미 600년을 넘겨 서한(西漢)보다 오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국 수도 변천의 세 번째 특징은 난징과 항저우 등 남부 지역에 도읍했던 국가들이 모두 전국 통치를 포기하는 등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난징에 도읍한 국가들은 대부분 할거 상황의 국가였다. 남부는 산이 많아 할거 국면 유지에 유리하지만, 북방 수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어 국가마다 북방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다.

후세 사가(史家)들은 그래서 남부 지역 도읍 국가들을 ‘지방에 안거해 만족해한다’는 뜻의 ‘편안(偏安) 정권’으로 규정했다. 수도의 남하를 통일국가 포기로, 난징 등 남부는 수도로 부적합함을 지적한 것이다. 남송 또한 항저우에 도읍하고도 당당하게 수도로 선포하지 못하고 행도(行都)로만 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금과 원, 청이 베이징을 수도로 한 건 베이징이 화북(華北)평야에 위치하고 동북평야와 몽골고원과 접하며 북쪽으로 장성과 연결돼 북방의 경제와 군사 핵심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진과 몽골, 만주족 등 여러 이민족과 한족이 교역하는 시장이 있어 어느 도시보다 이민족과의 왕래가 빈번했다. 특히 자기 근거지에서 멀지 않고 중원 통제가 용이하다는 점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한족 국가인 명의 영락제는 왜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했나? 난징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미약했다는 점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몽골 축출과 북방 견제, 안정적 전국 통치란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선 베이징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락제에게도 베이징은 수도의 최적지였다.

베이징은 분명 동북쪽에 치우쳐 있고 비옥한 토지도 많지 않다. 그러나 경항(京杭)운하 외에 동쪽으로는 톈진이 있어 해운을 통한 동남 물류는 물론이고 전 세계 물류를 공급받을 수 있어 경제적 약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또 다른 문화 중심지인 발해만과 접하고 있어 문화 정통성을 계승하는 도시의 자격도 충분하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동북에서의 주도권 상실로 엄청난 위상추락이 본격화됐던 근대사의 교훈과 러시아 등 현 북방 세력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수도는 당분간 베이징을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김종윤
대만국립사범대학에서 근대 중국근대사 분야를 연구하고 대만사범대학과 중국 중남민족대학 초빙교수 역임. 편(역)저로 『중국 전통적 가치체계의 현대적 의의』, 『동양문화의 기초』 등이 있다.



김종윤 전주대 중국어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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