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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바다가 있고, 섬이 있다.
● 길을 걷는 이유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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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느 길 위에서 무심히 걷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걷는 이유를 되묻곤 한다.
구태여 게으른 몸을 일으켜 세워 수고스럽게도 길을 걷는 이유는 아마도, 길이 주는 안온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냥 길 위에 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편안함은 '머무름'의 공간을 떠나 길이라는 '움직이는' 다른 공간에서 맞는 독립성 때문일 수도 있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일 수도 있으며, 새로운 풍경과 맞닥뜨림으로써 얻는 새로운 경험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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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굳이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길 위에서는 스스로와 대면할 기회가 조금은 더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맞는 대면의 시간이 더 여유롭다. 알랭 드 보통의 지적처럼, 그것이 자신 안의 못남과 대면하는 일일 수도 있고, 조금은 더 너그러워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은 어느 것이든 다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만나는 나는 대체로 부족한 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부족할지언정 그 부족함을 채워주는, 그래서 생각이라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이 가능한 풍경은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 그것이 숭고한 풍경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어쩌면 길 자체가 숭고한 풍경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길 위에서 혼자임을 느낄 때, 아마도 그 순간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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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와 뭍, 경계 위의 길
길은 바다와 동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땅의 끝과 바다의 시작은 서로 잇닿아 있었고,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길은 그 경계 위에 아스라이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길에게 바다는 욕망의 대상이었고, 동경이었으며, 그리움이었으며, 또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길이 아닌 그 길 위에 선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것이 길이든, 선이든, 금이든... 경계 밖의 세상은 늘 그러하기 때문이다. 항상 경계 너머의 세상은 터부를 안은 미지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경계의 밖과 안은 서로의 타협점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며, 그 경계를 기준 삼아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획정된 구획의 안정성 아래에서 자신과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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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다는 그저 묵묵한 뭍과는 달리 행동으로 조금씩 조금씩 경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파도에게 뭍은 경계의 벽이자, 가슴 깨지는 아픔이었겠지만, 쏴아아~철썩~ 비록 뭍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모든 노력과 시도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흰 포말로 부서지는 좌절과 실패의 연속일지라도, 파도는 또 밀려오고 있었다.
그 시도는 마냥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다와 극단적인 대치 상황에 직면한 수많은 절벽들의 깎아지른 비탈이, 혹여 뭍이 파도에게 곁을 내어 준 흔적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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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 솔향기길 1코스를 걷다
그래서일까. 길을 걸으며 연신 철썩대며 말을 걸어오는 파도소리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조금은 고민이 되는 시간이기도 했었다. 태안 솔향기길 1코스가 그랬다.
태안 솔향기길은 6개 코스, 전장 66.9km에 이르는 해안 둘레길이다. 태안반도를 뒤덮고 있는 해송 숲 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어서, 솔향기길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솔향이 길을 따라 비끼어 흐를 만도 한데, 초겨울의 해송들은 제 몸의 향기를 어딘가에 깊이 숨겨놓았던지 나의 무심한 코는 기어이 솔향을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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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꾸지나무골 해수욕장에서 시작된다. 썰물의 서해바다는 백사장을 벗어나 육지로 진군할 밀물의 그때를 대비하고 있었다. 밀고 쓸리는 동안 바다는 갯벌의 펄을 품느라 그 푸른 물빛은 잃었지만, 보는 이에겐 일상의 안일함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백사장을 벗어나면 길은 해송이 굽어보는 언덕을 오른다. 본격적인 솔향기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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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답(未踏)의 길을 걸을 때는 알 수 없는 설렘이 있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길인지라, 새로운 길과의 만남은 언제나 발견이며, 개척이기도 한 까닭이다. 여러 곳의 길을 걸었다는 경험을 이유로, 이 길이나 저 길이나, 그저 그런 비슷비슷한 길이라며 내 안의 희망을 접는 어리석음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설렘과 기대는 필수다.
새로운 길 위에서 만날 생경한 풍경들이며, 길이 들려줄 이야기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날 사람들은 나의 기대와 살렘 안에서 실제 기대했던 그 무엇이 되고, 그 무엇으로 인해 또 설렐 수 있음을 최근에야 조금이나마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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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관한 단상
저 멀리 섬이 보인다. 여섬이다.
<자전거 여행>를 쓴 김훈 선생은 '숲'이라는 단어를 발음해보면 마음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무심코 발음해 본 '섬'에서는 소리가 혀의 아랫부분을 스윽 훑고 지나며 입 안으로 흩어지다가, 종내는 코를 울리며 낮은 징소리마냥 질기고 헛헛한 여운이 느껴지는 소리가 난다. 어쩌면 겨울 뒤란의 대숲을 훑던 그 바람소리를 닮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파도소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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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음~'
마치 아득히 먼 바다에서 출발한 파도가 긴 항해를 마치고 어느 섬 모래톱에 살며시 다가와 안기며 내는 소리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머무름도 잠시, 파도는 섬에 머물지도 못하고 다시 먼 바다로 떠날 때에도 같은 소리를 낸다. 사르락대며 바람결에 서로의 몸을 부비는 댓잎마냥 아스라하다.
그렇게 소리로 왔다가 스러지는 파도마저 떠난 저 뒤편에는 보낼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무심한 섬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그래서 섬이다. 섬은 이름마저도 섬이라서 더욱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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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야 섬만 외로울까? 파도인들 오죽 할 것인가. 머무르지도 안기지도 못하는 섬을 향해, 뭍을 향해 쉼 없이 제 몸을 부딪는 파도의 절절함이야 시퍼렇게 멍든 몸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투정을 부리고, 앙탈을 부려도, 어느 순간에는 살며시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도 보지만 까딱도 않는 뭍이라니... 인연이라 여겼지만 인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모든 인연은, 그래서 슬프고 애달프다. 파도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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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그 와중에, 시퍼렇게 멍든 파도를 붙잡고 제 사랑을 하소연하던 한 남자를 떠올리고 말았으니, 통영의 바닷가에서 기약 없는 사랑에 눈물짓던 청마 유치환이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유치환
모든 사랑은 절절하다. 내 뜻과 무관한 타인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 더욱 그러하다. 그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그리움이야 사랑에 빠져본 이라면 그 누군들 모르랴마는, 그 어쩌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이는 아픈 것이다. 시조시인 이영도를 사랑한 청마의 마음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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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
(하략)
― <그리움>, 유치환
해방 후 만주를 떠나 고향인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유치환은 그곳에서 가사를 가르치던 시조시인 이영도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다. 유치환은 서른여덟의 유부남이었고, 이영도는 서른의 상처한 미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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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야 마음의 일이니 어쩌겠는가. 그 마음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준다면야 무슨 걱정이 있으며, 그 수많은 비련의 사랑 이야기도 쓰이질 리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뭍처럼 까딱도 않는 이영도를 향한 청마의 마음인들 어디 자기 마음대로 되었을 것인가.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영도의 마음을 얻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유교적 가치관과 세상의 벽을 넘지 못한다. 다가갈 수도, 그렇다고 멀어질 수도 없는, 그런 이유로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매일을 하루같이 목 놓아 울지만 끝내 다가갈 수 없는 섬처럼 파도처럼 그들의 사랑도 그러했다. 유치환과 이영도의 순애보적인 사랑은 유치환이 갑작스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그 순간까지도 이어졌었다. 그들이 나눈 20여 년의 사랑은 무려 5천통에 이르는 편지에 담겨져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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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 에메날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하략)
- <행복>, 유치환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하였다는 유치환은 거의 매일 통영의 중앙우체국을 찾아 우체국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곳에 사는 그녀의 집을 바라보며 편지를 썼었다. 그랬으니 목석(木石)인들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랴.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하략)
- <연인(戀人)>, 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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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긴 세월 동안 그리워하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은 유치환의 갑작스런 사고로 종지부를 찍고 만다. 유치환이 죽던 그날 밤 그녀는 미국에 있는 딸에게 편지를 썼다. '그이가 죽었다. 그이가 죽었다'고....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네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
- <황혼에 서서>, 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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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영도는 유치환으로부터 받은 편지 중 200여 통을 엮어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펴낸다. 이영도가 서둘러 서간집을 펴낸 이유는 청마의 이미지 추락을 막고, 청마가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세상 밖 그들의 사랑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고픈 이영도의 다급함 역시 숨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서간집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또 그만큼의 이런저런 논란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의 사랑이 간직한 운명이라면 운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청마 자신이 고백하였듯, 그들의 진실한 사랑을 막아선 사회적 제약마저도 그들의 현실이었던 것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현실 안에서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기 전까지 그들은 20여 년을 한결같이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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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관한 짧은 생각
불현듯 눈에 띤 섬에, 그 섬에 다가가고픈 파도의 아픔이 서러워 주책스런(?) 감상이 길어지고 말았다.
<섬>의 작가인 쟝 그레니에는 여행을 '일상의 삶 속에 그대로 잠들어 있는 여러 가지 감성들을 일깨우는데 필요한 자극제'로 정의한다. 만약에 그의 말이 맞다면, 갑작스런 사랑타령마저도 여행지에서 길어 올린 감성의 탓이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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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많은 나이듦이 서러운 그들마저도,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 흥얼거리기라도 해야 살 수 있는 것이 늙지 않는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이 아니던가.
그 마음이 이 마음임을 아는 까닭에 중년의 한 세월을 뜨겁게 사랑하며 노래했던 한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나마 아직도 살아있고, 또 살아가는 우리네의 메마른 가슴에 청마의 불타는 사랑의 곁불이나마 쬐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나이를 떠나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살아있음의 증표로서,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사랑의 감정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장 진실한 모습과 대면할 수도 있다. '내'가 아닌 '우리'라는 관계의 극단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최고의 공간이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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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의 저자인 단테에 의하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라,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게 바로 지옥'이란다. 그리고 '세상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지옥에서 사는 것'이라니, 지옥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사랑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사랑을 하자!
만약에 사랑을 한다면, 사랑의 대상 중 그 첫 번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마시길...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또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길은 다시 해송 숲길로 이어진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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