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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금주의역사 - 12월17∼20일] 영국의 로만 가톨릭 브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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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 12월17일 로마 교황 바오로 3세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를 파문한 것은 의미 없는 문서정리 같은 것이었다.

헨리 8세는 이미 그 4년 전에 가톨릭교에서 독립한 영국 국교회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어서다.

영국 국교회 창립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잘 알려져 있다.

헨리 8세가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신청했으나 당시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승인하지 않자 자신이 영국에서는 교회를 다스리는 수장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사자들인 클레멘스 7세와 헨리 8세가 모두 말썽 많은 인물들이어서 수많은 화제를 뿌렸다.

헨리 8세는 6번 결혼을 하고 그 가운데 2명의 왕비를 처형했으니 우선 방탕하고도 잔인한 군주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왕비만 죽인 것이 아니라 캐서린과의 이혼 과정에서 반대했던 신하들도 가차 없이 살해했다. 그 가운데는 인문철학자로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마스 모어도 있어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럼에도 헨리 8세는 많은 지적 소양을 가진 멋쟁이 왕이기도 했다.

반면 클레멘스 7세에게서는 그런 면모마저 보기 힘들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태생인 그는 뇌물과 음험한 공작으로 교황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교황으로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 식의 외교로 로마가 쑥대밭이 되는 재앙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가 헨리 8세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은 것도 기독교 교리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캐서린의 친정 조카가 에스파냐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로스 1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을 떠나 독자적인 영국 국교회를 창립한 것은 섬나라인 영국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종교적인 브렉시트라고 할 수 있다.

양평(언론인)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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