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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슈추적]70년 만에 풀린 ‘4·3수형인’의 한…검찰, 사실상 첫 무죄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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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재심서 18명 공소기각 요청

재판부, 1월17일 재심선고 예정

무죄땐 ‘4·3재판 불법’ 첫 인정

4·3, 70년 전 3만명 희생된 사건

중앙일보

지난 4월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은 추모객들이 4·3 당시 숨진 희생자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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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0주년을 맞은 제주 4·3사건 당시 군법회의에서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수형인들에 대해 검찰이 사실상 무죄를 구형했다.

제주지검은 17일 제주지법 201호 법정에서 진행된 4·3 생존수형인 18명에 대한 재심사건 결심 공판에서 ‘공소기각’ 의견을 냈다. 공소기각은 소송 조건이 결여된 경우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제주지검 공판 검사는 이날 공판에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따라 양근방(85)씨 등 18명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검찰 측은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버텨낸 여기 모든 분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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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제주시 이도2동 제주지방법원에서 4·3수형인 재심 사건 청구인들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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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4·3 생존수형인 18명은 지난해 4월 제주지법에 “불법 군사재판 자체가 위법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들은 “4·3 당시 계엄령과 국방경비법에 의해 1948∼1949년 이뤄진 군사재판은 불법 구금과 고문 등으로 모든 것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4·3 수형인에 대한 기록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수형인명부, 범죄수사경력회보, 군집행지휘서 등의 문서만 일부 남아있다.당시 계엄상태에서 행해진 군사재판에서 수형인들은 대부분 공소장 없이 형을 선고받았다. 4·3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당시 수형인은 2530명에 이른다. 대부분 징역 15년이나 무기징역 등 중형에 선고받은 뒤 한국전쟁 발발로 행방불명되거나 옥고로 숨졌다.

검찰 측은 이날 “70년 전 4·3 당시 군법회의에 대한 공소장이나 판결문이 없는 상황에서 공소 사실을 특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특정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공소권을 가진 검찰 측이 ‘재판기록이 없는 초유의 재심사건’임을 이유로 공소제기 자체를 무효로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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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에 전시된 ‘비설(飛雪)’ 조형물. 1949년 1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질 때 당시 25세 였던 변병옥(제주시 봉개동) 여인과 그의 두살난 딸이 거친오름 동쪽 기슭 눈속에서 희생된 시체로 발견된 것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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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은 내년 1월 17일 이들에 대한 최종 선고를 할 예정이다. 사법부가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할 경우 4·3 군사재판이 불법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 된다.

이날 생존수형자들은 검찰 측의 공소기각 요구를 지켜보면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생존피해자 양근방씨는 “4·3 이후 지금껏 힘들게 살아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죄다. 제발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말했다. 소송에 함께 참여한 김평국(88)씨는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는 이웃들이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봐도 사실대로 말조차 못했다”며 “내 몸과 마음을 묶었던 것들이 풀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생존수형인의 변호를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재심을 청구한 18명에 대한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이 불법적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구형”이라며 “18명 모두에 대해 무죄 구형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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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제주지법 앞에서 4·3 수형인 재심 사건 청구인들이 공판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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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소요사태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주민이 대거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것이 현대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954년까지 이어진 무력 충돌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이르는 2만5000~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경호 기자, 제주=최충일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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