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2)
뉴질랜드 남섬 그레이트 웍스(Great Walks) 중 밀퍼드 트랙을 걷고 있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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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잘못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세상이 정한 방향을 따라 더는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길은 보이지 않던 그 무렵 뉴질랜드 친구가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뒤틀고 끙끙거린 지 오래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병증을 끝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사람한테도 리셋키가 필요해!”
“컴퓨터는 키 몇 개만 누르면 되잖아. 새로 고침, 초기화, 복원 뭐 이런 거 말이야.”
“그러고 보면 사람이 하느님보다 훨씬 자비롭다니까. 우린 컴퓨터를 창조하면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줬잖아.”
그 무렵 우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리셋(Reset)이라는 화두를 앓고 있었다. 누구는 아픈 연애 후 새로운 인연을 만난 참이었고, 이직과 전직의 갈림길에서 코끼리 코 돌기를 반복하며 휘청이던 이도 있었으며, 흡혈 마귀 같다는 회사를 박차고 나온 친구는 속 시원하다면서도 깊은 한숨을 쉬곤 했다. 나로 말하면 명랑만화 캐릭터 가면을 쓴 채로 좀비가 되어간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근무 중 땡땡이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주말의 시체놀이로도 피곤은 가시질 않았다. 친구와 번개 술 한잔도 별 소용이 없었다. 만성 알레르기처럼 친근하기까지 했던 불안증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열병이 되고 있었다.
거울처럼 비추는 완벽한 반영을 보여주는 호수.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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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길이래요. 밀퍼드 트랙.”
빙하호수에 산이 완벽하게 비치는 사진이었다. 눈이 덮인 산 아래는 따듯한 풀과 꽃들의 키가 컸다. 이름도 거창한 일명 남반구 원정 프로젝트는 뉴질랜드의 스텔라가 보낸 사진 한장으로 시작되었다. 세상에 진짜 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신비한 산길. 어린 시절 닳도록 읽었던 책 『정글북』을 써서 노벨상을 받은 키플링 할아버지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불렀다는 길이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중간에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길이라고도 했다. ‘퇴로가 없는 길이라니!’ 뭔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원래 끌어다 붙이기 시작하면 모두 상징이 되고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법이다. 죽기 전에 한번은 가야 할 길이(대체 이런 건 누가 정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매번 불평하는 쪽이지만 왠지 그때는 거부할 수 없었다)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났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신은 명령하고 있었다. 당장 피오르드랜드로 와서 신내림을 받으라고. 열이 끓고 시름시름 앓고 오한과 발열을 거듭하던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뉴질랜드의 서남쪽 끝 피오르드랜드로 가기로 결심했다. 간절했던 리셋 키를 찾을 수 있을지, 과연 제자리 찾기가 가능할지, 왜 하필 밀퍼드까지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확실하진 않았지만 순식간에 정해졌다.
문득 피오르드랜드에서 불어온 빙하 바람이 뺨을 스치더니 ‘도저히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이끌었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갑작스레 사랑에 빠지듯 그리되었다. 어떤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기다려왔던 이가 누구였는지를 당장 알게 되는 것처럼.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한장의 사진으로 남반구로 떠날 운명임을 받아들였다고 해두자. 너무 따지지 말고.
밀퍼드 트랙(Milford track) 산 위에는 빙하 호수와 연못이 있다. [사진 박재희] |
“뉴질랜드는 하루가 제일 먼저 시작되는 나라잖아.”
“맞아. 이건 우리한테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이야.”
“반지원정대가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난 곳이잖아. 아주 딱이야.”
지구에 보호해야 할 환경이 어디 여기뿐이겠느냐마는 밀퍼드는 세계인류 유산으로 지정된 청정자연 보존지역이라 캠핑은 아예 불가능하다. 트랙 내 오두막의 최대 수용인원 40명에 들어야 한다.
하루 40명에게만 허락된 길이라니! 세계 트레킹족들이 뽑는 ‘죽기 전에 반드시 어쩌고저쩌고’ 버킷리스트에서 밀퍼드가 언제나 최고로 꼽히는 데는 어쩌면 이런 애태우기 작전이 한몫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던 열망이 살금살금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두막 확보는 온라인 예약만 가능하다. 최소한 6개월 전 성수기는 8개월 전에 확정해야 한다. 오로지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약 사이트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광클릭의 속도전에 돌입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다. 이것이야말로 조상의 은덕을 확인할 기회다. 선착순 40명. 적어도 조상 3대의 복을 받아야 획득할 수 있다는 오두막 잠자리 얻기 전투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빼꼼 내민 열망이 드디어 소리쳤다.
루트 번 트랙을 걷는 중, 호수 위로 구름이 바람에 밀려 산으로 쏜살처럼 올라간다.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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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자. 무조건. 여기 우리 가야 해!”
‘언젠가 한 번’이라고 습관처럼 말해왔지만 그날 우린 ‘언젠가’는 절대로 오지 않는 날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였다. 인간의 발길을 허락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원시의 땅, 태초의 길 밀퍼드와 루트 번 그리고 마오리족의 구름 신이 산다는 아오라키(Aoraki) 마운트 쿡으로 떠나기로 했다.
달력을 꺼내고 떠날 날짜에 예쁘고 동그란 반지를 그려 넣었다. 리셋 반지 원정대. ‘이름을 지어놓고 보니 무척 잘 어울렸다’ 라기에는 생뚱맞고 오글거림이 밀려왔다. 하지만 맘에 콕 들었다. 그럼 된 거다.
루트 번 트랙(Routeburn track) 여름에도 만년설이 쌓인 눈산. [사진 박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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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남반구 원정이라고 했으나 사실 우리는 평소 ‘삼보 이상 승차’를 부르짖는 탈것 애용자들이자 어눌한 트레킹족이었다. ‘즐기는 산, 즐거운 산’을 부르짖으며 등산보다는 놀멘 놀멘 ‘즐산’하는 사람들. 어마어마한 산보다 산으로 우길 수 있는 언덕을 선호하던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이름에 떡하니 그레이트가 붙어있는 그레이트웍스(Great Walks) 트래킹을 결정한 것이다.
기껏해야 수다 떨며 도시락 먹는 즐거움으로 산에 오르던 사람들이 말이다. 우리는 20대부터 50대까지 세상에서 보낸 시간의 길이가 다른 사람들이다. 하는 일이 다르고, 숨겨둔 아픔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견디지 못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도 다르다. 모두가 다른 이유로 리셋을 꿈꾸며 원정대를 꾸렸다. 뉴질랜드로 트래킹을 떠난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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