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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대화 강조하며 “연합훈련 중단” 요구…北 노림수는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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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너는 원래의 자리로 아무일 없었던 듯이 돌아간다. 빨간약을 삼키면 감당키 어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거야.” 빨간약을 먹은 네오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진실을 깨닫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2019년이 시작된 지난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네오처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빨간약과 파란약을 받았다. 파란약은 2018년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약이며, 빨간약은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이 약들은 신년사라는 상자 안에 함께 들어있다. 대화와 평화, 제재와 적대가 뒤섞인 신년사를 남한과 미국에 던진 김 위원장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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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18일 오후 평양 목란관에서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사를 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미국에는 ‘구애’, 남한에는 ‘압박’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데 대하여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다”고 밝혔다. 지난해 신년사에서 국가핵무력완성을 선언하며 핵 작전태세 구축을 강조한 것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나 과거에 이미 생산했던 핵무기 및 핵물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접하는 신년사에서 “완전한 비핵화는 당과 공화국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라고 언급한 것은 지금까지의 태도보다는 진전된 모습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상응하는 실천적 행동’을 언급하긴 했지만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호상(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는 원칙에서 공정한 제안을 내놓고 올바른 협상자세와 문제해결 의지를 가지고 임한다면 서로에게 유익한 종착점에 닿을 것”이라며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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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TV가 지난해 11월 1일 보도했다. 뉴시스


이같은 태도는 지난해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며 미국을 위협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협상의 당위성과 진정성을 강조하면서 제재를 풀지 않고 있는 미국이 입장을 바꾸기를 바라는 속내가 들어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영변 핵시설 사찰 등 구체적인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남한에 대해서는 한반도 전역에서의 적대관계 해소와 더불어 한미 연합훈련과 미군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의 완전한 중지를 요구했다. 한미 군 당국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과 해병대 대대급 연합훈련(KMEP), 비질런트 에이스(VA) 연합공중훈련을 중단한 상태다. 올해도 대규모 야외기동 연합훈련은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이같은 조치는 완전한 중단이 아닌, 북미 비핵화 협상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다. 북한 입장에서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와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조치에 미치지 못하며, 전면 중단만이 상응하는 수준의 조치로 판단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3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난 직후 “김 위원장은 한미 연합훈련이 연례적이고 방어적인 훈련이라는 점을 이해했다”고 밝힌 것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도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 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들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식 입장을 기준으로 할 때, 김 위원장의 입장은 한반도 긴장 완화와 관계없이 일관된 모습을 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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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군 관계자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폐쇄회로TV(CCTV) 설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장밋빛 미래’ 가능할까…불확실성 변수

김 위원장의 신년사 발표 직후 청와대는 “남북관계 발전과 북미 관계 진전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에 “만남을 고대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기대가 현실로 바뀌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경제협력 등을 통한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대북 제재가 해제되어야 하나 국제사회의 제재는 견고하다. 외교 소식통은 “미국도 유럽연합(EU)도 북한이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제재 완화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재 국면에서 남북 관계 개선과 긴장완화를 추진하려면 군사 분야에서 성과를 거둬야 한다. 지난해 세 차례의 정상회담 끝에 9.19 남북 군사합의서가 채택, 접경지역에서의 긴장완화와 상호 적대행위 중단 조치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군사 분야가 제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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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비무장지대 내 GP 시범철수 대상에 포함된 북측 GP가 지난해 11월 20일 폭파되고 있다. 국방부 제공


하지만 올해부터는 상황이 다르다. 남북 군 당국은 올해 군사공동위원회를 열어 비무장지대(DMZ)의 비무장화, 서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군비통제 등의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DMZ 내 일반초소(GP) 시범철수보다 높은 단계의 의제들로서 단기간 내 성과를 내기 힘들다. 특히 군비통제는 상당한 수준의 신뢰 구축과 정보공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시도조차 어렵다.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취해나가자”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을 토대로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 전면 중단, 한국군 전력증강 중지 등을 요구하면 군사공동위가 공전될 가능성도 있다. 군 소식통은 “9.19 남북 군사합의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군사 분야 합의는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미, 한미 관계가 올해 어떻게 흘러갈지도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신년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북미 협상에 대한 ‘속도조절론’을 거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위협이 없는 현재 상황만으로도 국내 정치에서 ‘생색’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의 전향적 움직임이 없다면 협상에 속도를 낼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미 관계는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1953년 이후 한미 관계는 우리나라의 군사, 외교관계에서 최고의 상수(常數)였다. 특히 양국 군 당국을 잇는 군사동맹은 한미 정치관계가 부침을 거듭해도 끈끈하게 이어진 상수 중의 상수였다. 팀 스피릿과 독수리훈련 등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이 연례적으로 실시되면서 한미 양국군 관계자들은 한반도 유사시 연합작전계획을 점검하고 양측 수뇌부의 군사전략을 이해하며 유대관계를 다져왔다. 군인들이 맺은 유대관계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대응,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적 개최 등에서 한미 공조를 이끌어내는 기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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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해부터 한미 군사동맹은 북미 관계에 영향을 받는 변수로 바뀌었다.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과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 연합공중훈련이 중지됐다. 올해도 독수리훈련같은 대규모 야외 연합기동훈련 대신 소규모 연합훈련이 실시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은 ‘북미 비핵화 협상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군사적 지원’으로 규정됐다. 올해 내내 이같은 기조가 유지된다면 1992년 팀 스피릿 훈련이 중단된 이래 가장 오랫동안 대규모 야외기동훈련이 유예되는 셈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훈련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준비 차원에서 진행되지만 한미 군 관계자들이 서로 부딪히며 비공식적인 유대관계를 쌓을 수 있는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2018년 북미, 남북, 한미 관계가 거대한 이벤트에 의한 긴장 완화의 출발점이었다면 올해는 구체적인 성과를 거둬 평화 분위기를 이어갈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다. 북미 협상은 열리지 않고 있으며 남북 관계는 국제사회의 제재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미 관계는 북미 대화의 변수이자 부산물로 전락할 위기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열기가 식어가는 상황을 반전시킬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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