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은 왜 하얀 알맹이일까 - 사탕수수 도시 트리니다드
한때 쿠바의 가장 큰 수출 품목이던 사탕수수의 최대 생산지였던 트리니다드의 로스 잉게니오스 계곡. 이곳에서 쿠바 설탕의 3분의 1이 생산됐다. 손호철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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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가보지 않았지만 한국전쟁이 평양에 의도하지 않게 기여한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근대적 계획도시 평양’이다. 미국이 무차별 폭격으로 건물들을 대부분 부숴버려 어쩔 수 없이 계획도시를 만들게 해준 것이다. 비슷한 논리지만 정반대의 경우가 쿠바다. 남미와 중미의 도시 대부분은 자본주의적 개발논리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버렸지만 1950년대 말 사회주의혁명을 거치면서 가난하게 살아온 쿠바의 도시들은 자본주의의 개발을 피할 수 있었다. 설사 개발하려고 해도 재원이 없어 1800년대 스페인 식민 시절 건물들이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보존된 곳이 바로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권위 있는 관광안내서인 <론리 플래닛>이 세계 최고의 관광지로 선정한 바 있는 트리니다드이다.
나는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떠나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가기 전에 산타클라라의 남쪽에 있는 트리니다드로 향했다. 이는 ‘영화의 도시’ 카마궤이를 거쳐가는 근 열 시간의 긴 여정이었다. 쿠바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인 카마궤이는 항구 도시인 아바나, 산티아고 데 쿠바와 달리 내륙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신앙이 두터운 ‘성당의 도시’로 1998년 교황 요한 2세가 직접 방문한 곳이다. 또 영주민들과 해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미로처럼 만든 미로의 도시이자 중남미영화 페스티벌과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쿠바의 ‘영화도시’이기도 하다. 사방에 유명 영화배우들의 얼굴 등이 그려져 있어 1920년대의 할리우드를 걷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건물 위, 건물 벽 등에 게바라의 사진 등이 걸려 있어 사진 찍기에 아주 좋은 도시였다. 그러나 트리니다드까지의 긴 길이 남았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야 했다. 서두르고 서둘렀지만 결국 저녁 늦게야 트리니다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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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버려져 해적 본거지 됐다가
아이티서 온 프랑스인들 정착하며
거대 계곡에 사탕수수 농장 운영
악어 모양으로 길게 누워 있는 쿠바의 한가운데 남쪽 해안에 위치한 트리니다드는 너무도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쿠바의 슬픈 역사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1514년 스페인이 도시로 개발한 초기 정착지로 코르테스가 멕시코 정벌을 준비한 곳이다. 그러나 이후 거의 버려지다시피 해서 해적의 본거지가 됐다. 트리니다드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아이티의 노예혁명 때문이다.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노예제를 폐지하고 아프리카계가 스스로 다스리는 최초의 공화국을 세웠다. 이 혁명으로 노예와 농지를 잃은 아이티의 프랑스인들이 트리니다드 지역에 정착했다. 여기에서 80㎞ 떨어진 시엔푸에고스를 ‘쿠바의 파리’로 발전시켜 거기에 거주하며 트리니다드의 거대한 로스 잉게니오스 계곡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 결과 이곳은 쿠바 설탕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사탕수수의 도시’로 발전했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무더위 속 채찍질 당하며 개간
아름다운 풍경 이면엔 슬픈 역사
다음날 먼저 간 곳은 이곳의 밥줄인 로스 잉게니오스 계곡.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녹색의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서 오히려 산들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끝없이 이어진 녹색의 파노라마 속에 여기저기 사탕수수 농장들이 보였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적당한 거리를 넘어 멀리서 바라보자니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노예들이 무더위 속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피눈물 속에 개간한 사탕수수 농장치고는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마디로 천국 속에나 있을 것 같은 ‘녹색의 정원’이다.
계단을 내려와 대표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방문하기 위해 계곡으로 들어갔다. 마을로 들어가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기념품을 팔러 나온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후손들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높은 탑이 나타났다. 사탕수수 농장의 평지에 44m 높이로 홀로 우뚝 솟아오른 이 탑은 노예들의 작업과 도주를 감시하던 감시탑이었다. 그 옆에는 엄청 큰 종이 있는데 노예들에게 작업 시작시간과 종료시간을 알려주는 종이라고 한다. 이곳에 끌려와 강제노동하던 노예들은 죽어서 사라졌다. 그러나 감시탑과 종은 세월을 살아남아 그들의 피눈물로 점철된 쿠바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자 설탕이 하얀 알갱이로 되어 있는 이유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채찍을 맞으며 일하던 노예들의 땀 속의 수분은 더운 날씨에 증발하고 남은 소금 성분들이 응고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설탕의 단맛 뒤에는 노예들의 땀이 응고된 짠맛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단것과 짠 것을 번갈아 먹는 ‘단짠단짠’을 찾는 것인가?
그 뒤로 긴 단층건물이 나타났다.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어 당시 쿠바 최고의 갑부였던 페드로 이즈나가가 18세기 말 건설한 저택이다. 건물로 들어가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 작업 중 갈증을 달래기 위해 사탕수수 줄기를 베어 먹는 노예, 자신들을 감시할 감시탑을 건설하고 있는 노예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아바나의 쿠바 박물관에 가면 노예선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노예선을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으로 배 안에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해 실제 수만큼 그린 노예들이 빼곡히 누워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수백명의 그림 속 노예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비극적 운명에 가슴이 메었다. 미국과 유럽의 물질적 풍요와 화려한 문명 뒤에는 이 같은 반인륜적 범죄행위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반인류적인 범죄를 통해 엄청난 돈을 벌어 이곳에 이 화려한 별장을 지은 이즈나가라는 친구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그도 부인에게는 자상한 남편, 자식들에게는 인자한 아버지였을 것 아닌가? 이 별장의 벽과 지붕, 방들은 하나하나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의 피와 땀, 뼈와 살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화려한 별장은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뼈와 살을 쌓아 지은 ‘흑골탑(黑骨塔)’에 다름 아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유명한 찬송가가 있다. “한때 나는 길을 잃었었지만/ 지금은 길을 찾았다네/나는 한때 눈이 멀었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다네”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이 노래는 사실은 노예상이 만든 노래이다. 노예상이었던 존 뉴턴은 노예수송 중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 죽음과 마주치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용서를 빌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회개하고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된 뒤 노예를 사고팔았던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며 만든 노래가 바로 이 노래이다. 그러나 뉴턴과 달리 이즈나가는 자신의 부끄러운 반인류적 범죄를 회개하고 이 세상을 떠난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관광도시로 변모
인구는 5만인데 관광객은 50만명
시장화의 빛과 그늘이 병존
여기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트리니다드는 더 이상 사탕수수의 도시가 아니라 관광의 도시이다. 쿠바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후 사탕수수의 나라에서 관광의 나라로 바뀐 것을 생각하면(아래 참조) 트리니다드는 쿠바의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형 피델에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낸 라울 카스트로는 트리니다드의 이 같은 변신을 쿠바 관광산업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언급한 바 있다. 트리니다드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지만 연간 이 인구의 열 배가 넘는 5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들을 위해 국영호텔이 900실, 민간숙박시설이 800실 이상을 공급하고 있고 100여개의 개인 식당들이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18년 전 쿠바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관광 활성화를 위해 개인식당 운영을 허용했지만 세 자릿수 이하로 제한했었다. 이번에 와 보니 그간의 규제완화로 사방에 상당히 큰 규모의 개인식당들이 늘어섰고 사방에 영어로 “방 빌려줌”이란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채찍을 맞으며 일하고 있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로스 잉게니오스 계곡 인근에 위치한 노예무역상의 옛 저택에 걸려 있다(위 사진). 사탕수수 생산지의 메카에서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변모한 트리니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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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는 1950년대 미국 자동차를 단장한 택시와 선물가게들이 넘쳐 났다. 선물가게들도 밀짚모자만 파는 가게, 1950년대 미국 자동차 그림만 파는 가게, 게바라부터 달라이 라마에 이르는 인물화만 파는 가게 등 전문화가 되어 있었다. 레스토랑에는 이제는 현직에서 은퇴했을 늙은 시가 장인이 직접 시가를 마는 시범을 보여주면서 시가를 팔고 있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역시 관광의 도시다웠다. 냉장시설이 부족한 만큼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날 잡은 싱싱한 고기들을 실온에 걸어 놓고 파는 정육점이 특이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두 명의 어린이들은 쿠바의 국민 스포츠인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야구선수가 되어 미국에 가서 일확천금을 버는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한데 요즘 쿠바의 젊은이들은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한다고 한다. 야구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스포츠’이고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이니 이것도 쿠바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탈아메리카의 증후인가?
마침 문 앞에 앉아 있는 아프리카계 아줌마의 모습이 보기 좋아 사진 좀 찍자고 했더니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관광도시이기 때문인지 일반인들까지도 자본에 물들어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또 외국인들로 가득 찬 고급 레스토랑 앞에는 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가 모자를 들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를 내걸고 있기는 하나 시장경제가 본격화된 중국에서 거지나 노숙인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쿠바에서 걸인을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래도 의료, 교육 등 기본적인 것을 국가가 해결하는 쿠바에서 거지라니 충격적이었다. 이 또한 쿠바의 시장화의 결과인가?
■ 소련과 미국 사이, ‘쿠바 밥줄’의 묘한 엇갈림
사탕수수의 정치경제학
쿠바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탕수수이다.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 후 경제특사로 소련을 방문한 체 게바라는 연간 100만t의 생산능력을 가진 제련소 건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소련은 제련소는 아름다운 쿠바의 자연을 해칠 뿐이라고 거절했다. 대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수출길이 막혀 남아도는 사탕수수 200만t을 해결해줬다. 소련은 자신들의 사탕수수 생산량을 줄여 연간 120만t을 사줬고 나머지는 동구와 중국이 해결해줬다. 혁명 이후에도 사탕수수에 의존하는 쿠바의 단일경작 경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가 멸망하면서 이는 크게 변화했다. 소련은 더 이상 쿠바의 사탕수수를 구입해주지 않았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이를 다시 미국에 팔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본주의 국제시장에서 생산성이 뒤떨어지는 쿠바 사탕수수는 경쟁력이 없었다.
쿠바 경제 버팀목이었던 사탕수수
소련 붕괴 후 농장 160개서 60개로
브라질 회사와 손잡고 회생 노력
라울 카스트로의 보고에 따르면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성은 하와이의 7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사탕수수에 크게 의존하던 쿠바 경제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소련 멸망 전까지만 해도 160개에 달했던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은 60개만 남았다.
현재 최고의 수입원은 관광
미국과 국교 정상화 후 더욱 번창
그 결과 과거에는 사탕수수가 쿠바 제일의 수입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현재 쿠바의 제일 중요한 수입원은 관광이다. 사실 관광은 과거 마피아들의 젖줄로 도박, 성매매, 돈세탁과 직결된 것이었기에 카스트로 등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 몰락 후 경제위기 속에서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혁명정부는 관광을 개방했고 관광산업은 이제 쿠바의 밥줄로 성장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의해 쿠바여행 제한이 완화되고 미국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관광객은 2017년 현재 연 470만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관광 수입 역시 급증하고 있다.
두 번째 주 수입원은 쿠바의 특산물인 시가이다. 국영 선물가게의 최고 인기상품은 시가이다. 셋째는 진한 맛이 특징인 커피이고, 넷째는 콜레스테롤 등 고지혈증에 특효로 알려져 있는 사탕수수 추출물인 폴리코사놀이다. 사탕수수는 이에 이은 다섯 번째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쿠바가 사탕수수 산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최근 세계 최대의 사탕수수 생산국인 브라질 회사와의 합작 투자로 사탕수수 농장을 현대화하여 헥터당 30t 정도인 생산성을 65t으로 올리려 하고 있다.
사탕수수의 정치경제학
시가, 럼, 폴리코사놀 등 쿠바의 특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면세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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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탕수수이다.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혁명 후 경제특사로 소련을 방문한 체 게바라는 연간 100만t의 생산능력을 가진 제련소 건설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소련은 제련소는 아름다운 쿠바의 자연을 해칠 뿐이라고 거절했다. 대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수출길이 막혀 남아도는 사탕수수 200만t을 해결해줬다. 소련은 자신들의 사탕수수 생산량을 줄여 연간 120만t을 사줬고 나머지는 동구와 중국이 해결해줬다. 혁명 이후에도 사탕수수에 의존하는 쿠바의 단일경작 경제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가 멸망하면서 이는 크게 변화했다. 소련은 더 이상 쿠바의 사탕수수를 구입해주지 않았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이를 다시 미국에 팔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본주의 국제시장에서 생산성이 뒤떨어지는 쿠바 사탕수수는 경쟁력이 없었다.
쿠바 경제 버팀목이었던 사탕수수
소련 붕괴 후 농장 160개서 60개로
브라질 회사와 손잡고 회생 노력
라울 카스트로의 보고에 따르면 쿠바의 사탕수수 생산성은 하와이의 7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사탕수수에 크게 의존하던 쿠바 경제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소련 멸망 전까지만 해도 160개에 달했던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은 60개만 남았다.
현재 최고의 수입원은 관광
미국과 국교 정상화 후 더욱 번창
그 결과 과거에는 사탕수수가 쿠바 제일의 수입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현재 쿠바의 제일 중요한 수입원은 관광이다. 사실 관광은 과거 마피아들의 젖줄로 도박, 성매매, 돈세탁과 직결된 것이었기에 카스트로 등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 몰락 후 경제위기 속에서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혁명정부는 관광을 개방했고 관광산업은 이제 쿠바의 밥줄로 성장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 의해 쿠바여행 제한이 완화되고 미국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관광객은 2017년 현재 연 470만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관광 수입 역시 급증하고 있다.
두 번째 주 수입원은 쿠바의 특산물인 시가이다. 국영 선물가게의 최고 인기상품은 시가이다. 셋째는 진한 맛이 특징인 커피이고, 넷째는 콜레스테롤 등 고지혈증에 특효로 알려져 있는 사탕수수 추출물인 폴리코사놀이다. 사탕수수는 이에 이은 다섯 번째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쿠바가 사탕수수 산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최근 세계 최대의 사탕수수 생산국인 브라질 회사와의 합작 투자로 사탕수수 농장을 현대화하여 헥터당 30t 정도인 생산성을 65t으로 올리려 하고 있다.
손호철 |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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