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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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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처럼 묵묵히…이구열 미수 문집 ‘청여산고 1·2’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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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당시 회고하는 춘곡 고희동

인삼주를 엽차처럼 마시던 천경자…

국내 첫 미술전문기자로 60여년간 집필한

인터뷰·취재기·비평 등 100편 엮어



한겨레

“명색, 그림을 시작한 지가 꼭 예순한 해가 되는군, 달리 한 일이라곤 술 마신 것뿐이고…”

1915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이땅에서 처음 근대 양화를 그린 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의 쓸쓸한 회고담이다. 그는 1963년 11월 서울 제기동 자택 거실에서 이구열 기자와 미술사학자 최순우, 평론가 이경성을 만났다. 청회색 핫바지 차림으로 파고다 담배를 피면서 지난 삶을 털어놓는 노화가의 얼굴엔 회한이 서렸다. 그림 유학 떠나기 전 청년시절을 떠올리던 춘곡은 고종의 황실에서 궁내부 주사로 일했던 1905년 11월, 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그달 17일의 긴박했던 밤과 다음날 새벽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궁중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찾은 경운궁 숙직실에서 쿨쿨 자는 당번 옆에 널브러진 궁중일지에 ‘궁중무사(宮中無事:별다른 일 없다)’라고 적힌 것을 본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고 했다. ‘어쩌다 나라 꼴이 이리되었는가’를 되뇌이면서 머리 떨어뜨린 채 대한문을 나갔다고 춘곡은 57년전의 망국 체험담을 털어놓았다. 60년대 화단의 추상미술 붐을 두고는 “미친 짓들이야”라고 힘주어 일갈하더니, 막 추상회화의 기수로 뜨기 시작하던 수화 김환기 작품에 대해서도 “수화가 이상해졌더군…모두들 모를 그림만 그리려 드는 것 같던데”라고 당혹해하는 노대가의 모습도 기자의 시야에 들어왔다.

‘거북이’란 별명이 붙은 국내 최초의 미술전문기자 출신 평론가 청여 이구열씨는 56년전 벌인 춘곡과의 인터뷰 글을 최근 펴낸 자신의 신간에 실었다. 88살 미수를 기념해 펴낸 문집 <청여산고 1·2>(에이엠아트)의 1권 첫머리에 펼쳐놓은 것이다. 1964년 잡지 <미술>1호에 실렸던 이 글 내용은 이구열이 아니었다면, 영영 사라졌을 춘곡의 기억 속 대한제국의 풍경과 상념들이다. 책에서 바로 이어지는 다음 글이 1965년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있었던 천경자(1924~2015) 작가의 하얀 2층집 방문기다. 여기서도 이구열이 취재했기에 남게 된 거장 천경자의 40대시절 풍모를 만나게 된다. 막 마흔을 넘긴 천 작가는 전화를 걸고 찾아온 이구열 기자에게 몸 상태가 불편하다면서 “가슴 속에 커다란 고무풍선 하나가 들어있는 것만 같은 그런 증세”라고 재기있게 하소연하고 있다. 인삼주를 엽차처럼 같이 마시면서.

<청여산고 1·2>는 1949년 황해도 연안중학교 재학 시절 교지에 실은 서양미술사 설명 글부터 2018년 쓴 작고작가 이성자를 추억하는 글까지 기자와 평론가, 미술사학자로 60년이상 종횡무진한 이씨의 원고 100편을 추려 엮었다. 1권 ‘근대한국미술 작가와 작품’ 편은 한국의 20세기 미술가 50여 명을 조명하고, 2권 <근대한국미술 에세이와 비평>은 기자이자 평론가로서 썼던 취재기, 에세이, 비평 등을 실었다.

지은이는 59년 <민국일보> 문화부 기자로 입문해 1973년 <대한일보> 문화부장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날 때까지 최초의 미술전문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1975년엔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세워 미술사학자이자 미술비평가로서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사료 발굴과 작가론 집필, 전시 비평 작업을 지속했으며, <한국미술전집>(1975) <한국근대회화선집>(1986~1990)의 기획과 편집을 맡았다.

미술잡지 <아트인컬처> 주간인 김복기씨의 편집으로 완성된 두권의 책은 지난 60여년간 이씨가 조사, 취재해온 한국 근현대미술사 100여년의 시공간을 품고있다. 88년 해금 뒤 월북작가들의 현황과 개별 작가들의 작품론 소개를 비롯해, 국민작가 이중섭의 스승이었던 유학파 작가부부 임용순·백남순의 숨었던 수작들의 발견 과정, 황술조·구본웅·이인성 등에 대한 재조명 등 우리 근대미술사의 과거와 현재에 얽힌 숱한 이면의 일화, 비화들이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며 독서욕구를 자극한다. 미술사 사료를 찾아 발굴, 분석하고 이면의 숨은 이야기와 정황까지 꼼꼼하게 기록하는 지은이의 한결같은 글쓰기 태도는 경이롭다. 거북이처럼 묵묵히 한국 미술사를 지켜본 그의 글들이 가장 구체적이고 정직한 미술사료로 학계에 이름 높은 것도 이런 미덕에서 비롯된 바 크다. 2014년 출간된 <나의 미술기자시절>(돌베개)에 뒤이어 60년 청여의 미술사 행적을 한달음에 두루 확인해볼 수 있는 역저가 바로 <청여산고>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책 서문에서 “아직 포함되지 못한 산고들도 50여편 가량 남아있어 구순까지 살 수 있다면 적당한 시기에 속편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남은 의욕을 내비쳤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에이엠아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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