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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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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대표 父가 친일파?…100만 관객 돌파 영화 '말모이'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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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상자, 해방 직후 발견 ‘기적’ / 학회 기관지 ‘한글’, 88년째 명맥 유지

바야흐로 1940년대.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의 말살에 나선다. 이에 맞서 최초의 국어사전 편찬을 준비하던 조선어학회는 시련을 맞는다. 1942년 학회 대표인 이극로(1893∼1978) 선생을 비롯해 33명이 투옥된다.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옥사한다. 일명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들의 노력은 1947년 조선말큰사전 제1권이 발간되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난 9일 개봉해 올해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관객 수 100만명을 넘어선 영화 ‘말모이(감독 엄유나)’는 이 같은 실화를 토대로 한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란 현실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없지 않다. 영화 제작진이 자문을 받은 조선어학회의 후신 한글학회의 김슬옹 연구위원(국어단체연합 국어문화원 부원장)과 18일 개정 2판이 나오는 ‘우리말의 탄생’ 저자 최경봉 원광대 교수(국어국문학)의 도움으로 사실 관계를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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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에서 브로맨스를 과시하는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맨 오른쪽)과 사환 김판수.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극로 선생 ‘빈농’ 출신…일제, 사전 원고 ‘압수’

17일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말모이’는 ‘주시경 선생 등이 1910년 무렵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1914년 주 선생 사망으로) 끝내지 못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이면, 그 뜻이 모이는 곳에 독립의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란 극 중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역)의 대사에 함의가 숨어 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극로 선생이 류정환의 실제 모델이다. 류정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친일 재력가로 묘사된다. 이와 달리 이 선생은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이었다. 광복으로 풀려나 조선말큰사전 발간 작업을 진두지휘하다 월북한다.

사전 원고가 든 가방을 건물 안에 숨긴 뒤 최후를 맞는 학회 사환 김판수(유해진 역)는 가공인물이다. 실제로는 일제 경찰이 사전 원고를 압수했다. 원고지 2만6500여장이란 방대한 분량이었다.

영화처럼 원고가 담긴 상자가 1945년 9월8일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다. 해방 이틀 전 조선어학회 사건 상고심 재판의 증거물로 운송돼 방치돼 있었던 것.

“이 원고를 찾지 못했으면 우리말 사전의 출판까지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길어졌을 문화적 정체로 해방의 의미가 퇴색했을 수도 있었다.” 최경봉 교수는 ‘우리말의 탄생’에서 이같이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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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는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의 모습.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국어학자들 “우리말과 글 발전 위한 ‘촉매제’ 되길”

한반도 전역의 사투리를 모아 벌이는 극 중 공청회는 표준어 사정을 위한 표준어사정위원회의 독회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는 일제 당국의 눈을 피해 한 극장에서 며칠간 극비리에 이뤄진다. 결국 발각되고 만다.

‘우리말의 탄생’에 따르면 독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건 아니다. 학회는 1933년 지역별 73명의 위원을 선발해 1935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충남 아산군과 서울, 인천에서 한 번씩 3차례에 걸쳐 독회를 진행했다.

1936년 10월 표준어 사정 결과 발표회를 기점으로 상황이 급변한다. 안창호 선생의 축사 때문이었다.

“조선 민족은 선조로부터 계승해 온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결국은 국가까지 잊어버렸다. 다만 조선어만을 보유하는 상태이므로 이것의 보급·발달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뒤 일제 당국은 학회가 여는 모든 집회를 금지했다. 1942년 사건의 서막이었다.

영화에 수차례 등장하는 국민총력연맹은 실제로 있었던 친일 단체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정식 명칭이다. 학회 기관지인 잡지 ‘한글’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1932년 5월1일 창간한 이래 88년째다.

김슬옹 한글학회 연구위원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민중이 말을 수집해 학회에 편지를 보낸 것도 사실”이라면서 “우리 말과 글을 계속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말모이’를 이를 위한 중요한 촉매제로 삼고 정부는 한글 운동 100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꼬집었다.

최경봉 교수도 “‘말모이’는 우리말 사전이 왜 그렇게 만들어져야만 했는지 극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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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4일 충남 아산군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표준어 사정을 위한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첫 독회를 마친 뒤 찍은 사진. 영화 ‘말모이’ 속 학회 대표인 류정환의 실제 모델 이극로 선생(맨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이 보인다. 이 선생의 오른쪽은 최현배 선생. 한글학회 제공


◆한글 깨치며 현실 직시하는 김판수…‘택시운전사’ 오버랩

허구적 인물인 김판수는 당대 소시민을 표상한다. 홀로 두 자녀를 키우며 소매치기로 근근이 먹고산다. 돈 때문에 학회에 사환으로 취직한다. 까막눈이던 그는 한글을 배우면서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뜬다. “말과 글에 공동체정신이 담겨 있다”는 학회 회원 구자영(김선영 역)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 “동지”임을 강조하며 학회 일에 팔을 걷어붙인다. 공청회 개최도 주도한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김만섭(송강호 역)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서울의 택시 기사 김만섭도 1980년 5월 돈 때문에 우연히 광주에 갔다가 현실을 목도하고 각성하게 된다. 이들 사이에 닮은 구석이 많은 건 두 영화 모두 엄유나 감독이 각본을 쓴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판수 역할을 맡은 배우 유해진은 “조선어학회 분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우리말을 참 소중하게 지켜왔구나를 느끼는 작업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영화에서 류정환의 대사로 나오는 이극로 선생의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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