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미국과 소련 간 핵전쟁을 '치킨 게임'으로 단순화해 다룬 것이기도 하다. 양쪽 중 누구 한 명이 핸들을 안 틀면 둘 다 죽는 치킨게임에서 미리 핸들을 뽑아 던지고 출발한다면 상대편은 겁을 먹고 핸들을 틀 가능성이 커진다. 상대를 불안케 하는 미치광이 전략이다.
주인공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전쟁 억제력이란 적에게 공포심을 안겨주는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핵 억제력(deterrence)은 원리대로 잘 작동해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미국의 장군 한 명이 정신이상을 일으켜 핵 출격 명령을 내리고 자살함으로써 폭격기를 돌릴 수 없게 된다. 핸들을 뽑고 정면충돌을 위해 달리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련 역시 영화에서 미국 모르게 '미치광이 작전'을 마련해놓은 점이다. 소련은 적국의 원자폭탄이 영토 안에서 터지면 자동으로 핵미사일 1만개를 목표로 발사하는 '둠스데이 머신'이란 시스템을 가동 중이었다.
결국 미·소가 상대를 극단적으로 위협하고자 만든 장치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인류는 파멸에 이른다.
다만 인류가 완전히 멸종되진 않는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핵전쟁이 일어나면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지하벙커와 대피 계획을 미리 만들어놨다. 대통령을 위시한 고위급 남성들이 0순위로 들어가고 번식을 위해 선별된 매력적인 여성들도 포함된다. 원활한 인류 번성을 위해 남성 대 여성 비율은 1대 10으로 설정했다. 벙커 생존을 위한 고위급 회의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암울한 분위기 속에 막을 내린다.
영화는 진보의 상징으로 여겼던 과학이 어떻게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갈 수 있는지를 통렬히 비판한다. 또 '미친 과학자'가 나오지 않도록 할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상기한다.
물리학, 과학철학, 인공지능(AI) 등을 연구한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펴낸 신간 '크로스 사이언스(21세기북스)'는 이처럼 과학과 대중문화가 만나는 장면을 통해 첨단 기술의 미래와 영향을 쉽게 설명한다.
홍 교수는 과학과 인문학을 학문적으로 융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생각의 결과물이 바로 서울대 학부생 대상 교양 과학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이다.
크로스 사이언스 |
인종 차별의 사상적 배경을 과학으로 풀어낸 대목도 흥미와 깊이를 동시에 지녔다. 그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사이비 과학'이 인류를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내몰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근대 이탈리아 법의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범죄자 얼굴 모양을 연구해 범죄인 얼굴상이 일반인과 차이 난다고 결론 내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범죄자에는 '안면 결점'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입이 튀어나온 게 대표적이다.
20세기 초반 유럽 인종학 교과서엔 여러 인종의 얼굴을 그려놓고 누가 문명인이고 누가 야만인인지 구별하는 문제가 실리기도 했다. 예상할 수 있듯 문명인 얼굴은 백인 얼굴이었다. 이런 교육은 유럽의 인종차별주의를 강화했고 1930년대 독일 권력을 손에 쥔 히틀러의 '아리안 우월주의'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는 타락하고 불결한 민족이며, 아리안족 중에서도 변종인 장애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는 오염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은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홀로코스트'의 비극으로 현실화한다.
지금까지도 과학의 이름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흑인 아이큐가 낮기에 흑인이 가난하다고 백인이 주장하면 '인종 차별'이라고 비난하지만, 한민족 아이큐가 다른 인종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 우쭐해진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 언어'라는 말에도 기뻐한다.
그러나 이런 비과학적인 말과 사고 속에서 과학의 외피를 뒤집어쓴 '사이비 과학'이 자라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본성', '천성', '자연스러움', '피', '유전자' 등의 단어는 우리 허영심을 자극하고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이비다.
21세기북스. 1만7천원. 353쪽.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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