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의장' 출간
홍문대기(왼쪽)와 기린기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재위 1834∼1849)이 1837년 효현왕후와 혼인하는 모습을 기록한 '헌종효현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班次圖·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에는 왕의 행렬이 상세히 묘사됐다.
선두에는 큰 삼지창에 동그랗고 붉은 털을 매단 기물인 '둑'이 있다. 군대를 출동시키는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둑은 군사를 지휘하는 왕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는 의장물이다.
그 뒤에서는 상승하는 용과 하강하는 용을 그린 교룡기(交龍期)를 들었다. 교룡기 또한 둑처럼 왕이 군대를 사열하면서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던 군기였으나, 영조(재위 1724∼1776) 대부터 왕을 상징하는 의장 깃발이 됐다.
조선시대에 교룡기 같은 의장기는 모두 28종 있었다. 의장(儀仗)은 행사 격을 높이고 주인공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의장기에는 상서로운 동물이나 길상적 문자를 그렸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최근 발간한 '왕실문화도감-의장'에 따르면 왕의 행차에 사용하지 않는 의장기가 단 한 종류 있었다. 기린을 묘사한 기린기다.
기린은 사슴과 유사하나 말처럼 발굽과 갈기를 지닌 상상 속 동물이다. 머리에 긴 뿔이 있는 기린은 신령한 존재로 인식됐지만, 기린기는 왕세자나 왕세손의 의장으로 분류됐다.
둑(왼쪽)과 교룡기 |
왕과 세자가 쓰는 의장기는 규모나 다양성 면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였다. 조선 후기 왕이 황제 조서를 들고 온 중국 칙사를 맞이하거나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갖추는 대가의장(大駕儀仗)에는 의장기 27종이 동원됐다.
둑과 교룡기 뒤에서는 빨강 바탕에 청룡을 그린 홍문대기(紅門大旗)를 들었고, 오방기(五方旗)인 황룡기·백호기·주작기·현무기·청룡기가 행렬을 이었다.
대가의장에는 육정기(六丁旗)라는 흥미로운 깃발도 나왔다. 정미기·정축기·정유기·정묘기·정해기·정사기로 구성된 육정기는 중앙에 부적 문자를 쓴 점이 특징이다. 문자 위에는 꽃으로 만든 관을 쓴 신인상(神人像) 얼굴을 그리고, 아래에는 십이지 동물을 표현했다.
육정기 중 '정미기' |
육정기에 이어 상서로운 동물인 백택, 삼각수, 각단, 용마를 각각 묘사한 깃발을 든 사람들이 차례대로 걸었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이나 '군왕천세'(君王千歲) 글자를 쓴 깃발, 검은 학·흰 학·비취색 봉황 깃발, 거북 위에 올라탄 선인을 나타낸 깃발인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영(令)·금(金)·고(鼓) 글자를 하나씩 수놓은 깃발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가의장에서 행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의장기는 검은색 후전대기(後殿大旗)다. 후전대기는 청룡과 현무를 그린 두 종류가 있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 세자 행차에 나오는 의장기는 6종에 불과했다. 기린기 외에 백택·검은 학·흰 학 깃발과 가귀선인기, 영(令)자 깃발이 의장을 구성했다.
여성인 왕비와 왕세자빈은 의장기 중 유일하게 백택기를 썼고, 후궁 행차에는 의장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교룡기 |
의장에는 깃발뿐 아니라 자루 위에 살을 만들고 휘장을 덮어 우산과 유사한 개(蓋)와 산(傘), 먼지를 차단하고 주변을 가리는 선(扇), 깃발과 비슷한 원통형 구조물인 당(幢) 등도 있었다.
'왕실문화도감'은 조선과 대한제국 의장 구성을 소개하고 의장물을 하나하나 상세히 다뤘다. 그림과 사진을 풍부하게 실어 시각적으로 화려하다.
신재근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의 의장 제도는 고려에 비해 더 세분됐다"며 "상징적 색상과 도안, 종류와 수량, 배열 위치 등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구현해 의례 주체와 규모, 성격을 명확히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 후기 왕의 대가의장은 167건이었고, 왕비 의장 55건, 왕세자 의장 35건, 왕세자빈 의장 21건, 왕세손과 왕세손빈 의장 19건으로 규정됐다"며 "조선 전기에는 군에서 사용한 기물인 둑과 교룡기가 의장에 포함된 점이 조선 후기의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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