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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차 향기 그윽한 여행] '1천200년 왕의 녹차' 산지 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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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차밭이 바라다보이는 작은 찻집에서 차를 마신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것도 따스한 햇볕이 잘 내리쪼이는 남녘의 어느 차밭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경남 하동군 악양의 면사무소 앞 작은 차밭에 세워진 목조 가옥의 나무 바닥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활활 타오르는 톱밥 난로는 아니지만, 화력 좋은 등유 난로는 오히려 살짝 덥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한겨울에 창밖으로 파릇파릇한 녹차밭이 보이는 풍경은 순간 계절을 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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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면의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는 볕이 좋은 차밭에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사진/성연재 기자]



저 멀리 차밭을 거닐던 한 노인이 힘들다고 도와달라 소리를 치자 손자와 아들로 보이는 부자가 뛰어나가 부축해 온다. 중년의 아들은 핀잔을 준다.

"몸도 편찮으시면서 왜 멀리 가셨어요?" 그러자 손자가 할아버지 편을 든다.

"할아버지도 멀리 가보고 싶으시잖아요." 차밭 주인 가족인 모양이다.

사람 사는 내음이 짙게 다가오는 이런 곳으로의 여행은 행복으로 다가온다.

이곳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매암차문화박물관이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과 차밭 관람은 무료다. 이곳에서는 차밭을 조망할 수 있는 찻집에서 3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홍차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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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을 활용한 악양면의 매암차문화박물관 [사진/성연재 기자]



하동은 녹차의 고장이다. 또한,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삶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사람들의 삶이 되었다'는 하동. 일찍이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이다. 눈 아래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최 참판 댁은 이미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십리벚꽃길을 찾는 사람은 해마다 늘어만 간다. 그렇지만 하동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떠들썩한 봄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지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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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암차문화박물관 실내 [사진/성연재 기자]



◇ '1천200년 왕의 녹차'

볕 따스하고 물 맑고 공기 좋은 화개면의 '전통 차(茶) 농업'은 2017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지정을 받았다. 전남 완도군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도 밭담 농업에 이어 국내에서는 세 번째다. 2015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제6호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동의 전통 차 농업은 1천2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차 농사가 시작된 곳으로도 손꼽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시대인 828년(흥덕왕 3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공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 이르러 성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1천200년 전에 이미 차 농사가 하동에서 시작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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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배기에 조성된 '천년차밭' [사진/성연재 기자]



발길을 돌려 악양 들판에서 나와 전남 구례 쪽으로 향하다 보면 떠들썩한 장터가 눈에 띈다. 이곳이 조영남의 노래로 유명한 화개장터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이런 노랫말대로, 하동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전남 광양이다. 산과 들에서 나온 각종 특산물이 이곳에서 거래된다.

화개장터가 있는 곳이 화개면인데, 이곳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차 재배단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남 보성과 쌍벽을 이루는 녹차 재배지로 유명한 하동은, '야생 녹차'를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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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야생 녹차밭길에 조성된 천년차밭길 [사진/성연재 기자]



화개천이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각도의 정금리 언덕에는 야생 녹차 군락이 있다. 최근 형성된 녹차밭들은 '앞으로 나란히'를 외치듯 대부분 가지런히 줄지어 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뭉게구름이 자유롭게 언덕을 따라 흩어지듯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 정금리 지역의 가파른 차밭 사이로 2.7㎞ 길이의 '천년차밭길'이 조성돼 있다. 이 길의 좋은 점은 화개천을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지리산 자락과 아래쪽에 펼쳐진 화개지역이 녹차밭을 배경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시배지 아래엔 하동야생차박물관이 있다. 예약하면 전통 덖음차을 맛보고 다례 시연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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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차밭' 모습 [사진/성연재 기자]



◇ 맛깔스러운 녹차 소재 음식

가파른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사실 하동은 여러 차례 방문했던 터라, 대부분의 음식은 이미 맛본 뒤였다. 명물 민물 참게를 갈아 넣었다 해서 이름을 얻은 '참게 가리장', 섬진강의 대표적인 먹거리 재첩을 끓인 '재첩국' 등 하동을 대표하는 먹거리들은 이미 섭렵을 한 뒤라 새로운 것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특이한 곳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판도 매력 있고, 파란 페인트로 마감한 예쁜 카페 분위기에 끌려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바깥쪽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안쪽에서는 식사를 할 수 있어서 메뉴를 봤더니 하동 녹차를 소재로 한 퓨전음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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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로 전통음식을 재해석한 한 음식점의 메뉴 [사진/성연재 기자]



몇 년 만에 하동을 찾았더니 이런 변화가 있었다. 여러 번 찾아도 늘 새로운 곳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곳은 도태하기 마련이다. 일단 세팅 자체가 깔끔했다. 집안에서 개발된 듯한 메뉴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듯했다. 삼겹살을 녹차 소스로 쪄낸 삼겹살찜 등 녹차를 재료로 한 음식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웠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식사와 함께 세팅된 녹차 씨앗 기름이었다. 작은 종지에 담긴 이 기름은 위벽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함께 서빙된 녹차 와인은 달콤하면서도 녹차 특유의 향을 지니고 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한 뒤 바깥으로 나왔더니 20대 여성들이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전시된 녹차 제품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있어 주인장께 물었다. 잭살이라는 이름이 왠지 좀 미국식 같았기 때문이다. "잭살이 뭔가요?" 맘씨 좋게 생긴 주인장은 작설차의 하동 방언이라 답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ㅏ' 발음을 잘 못 해요. 'ㅏ' 대신 'ㅐ'발음을 하곤 합니다. 잭살은 작설차의 이 동네 방언이죠."

◇ 항공사·스타벅스에도 납품

하동군은 미국 스타벅스 본사와 가루녹차 납품 계약을 맺고, 지난해 50t을 수출했다. 스타벅스에서 요구한 양은 200t이었지만, 생산량이 주문량에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스타벅스가 요구한 녹차의 색상은 아주 연한 녹색이다. 그 기준에 맞추려면 차나무가 햇볕을 직접 받지 않도록 하는 차광작업이 필수다. 이점이 걸림돌이어서 하동군은 전력을 다해 차광시설 면적을 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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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관리로 항공사에 납품되는 동천의 녹차 [사진/성연재 기자]



정금리 야생 녹차밭 앞쪽에는 ㈜동천이라는 큰 녹차 가공공장이 있다. 동천은 하동 정금리, 운수리, 삼신리 3개 지역 총 78㏊의 재배면적에서 나오는 생엽을 납품받아 다양한 제품을 가공해 판매한다. 생산량은 연간 생엽 기준 700여t에 달한다. 스리랑카처럼 체계적인 티 팩토리 관람 코스는 없지만, 취재를 위해 요청을 한 뒤 내부를 둘러봤다.

우선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마치 반도체 공장에 들어갈 때처럼 먼지를 털어내는 방을 거쳐야 한다. 먼지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빠지지 않도록 방진복과 부직포로 된 모자를 써야만 했다.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 시스템이다. 생물학적 위해 요소(대장균군, 대장균, 진균, 일반미생물 등)도 제어한다.

내부에 철 성분을 있을 경우 이를 잡아내는 센서가 따로 있으며, 포장이 잘못된 경우도 자동으로 걸러낸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된 녹차는 국적 항공사와 동서산업 등에 납품된다.

이 녹차 공장은 2007년 농약 파동으로 녹차 산업에 위기가 왔을 때 하동 화개면 정금리 등 3개 지역에서 품앗이 단을 구성해 위기를 타개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 '녹차밥' 맛 깔끔한 게스트하우스

기분 좋은 식사를 한 뒤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소규모 다원인 금향다원에서 운영하는,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게스트하우스다. 게스트하우스는 중년 여주인과 아들인 20대 청년이 운영하는데, 여주인은 전화예약을 하니 "군불 뜨끈하게 때 놓겠다"고 했다. 밤늦게 들어가 보니 방바닥이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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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맛본 조식 [사진/성연재 기자]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에 주문한 조식을 맛보기로 하고 별채로 내려갔다. 여주인과 아들이 정성스레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밥은 갓 지은 가마솥 밥으로 맛이 깔끔했는데, 찻잎을 밥 위에 얹어준다. 녹차 밥이다.

반찬 역시 젊은 사람들의 감각에 맞는 샐러드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곳은 어머니와 아들이 직접 녹차 농사를 짓는 곳으로, 부지 내에 별도의 차 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lpo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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