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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강남 스타일’보다 시흥 삼미시장이 먹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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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관광’ 마을을 살린다

② 체류형 관광 즐기는 외국인들

동네 빵집에 가서 현지인과 수다

한드 덕후는 드라마 몰아보기

찜질방도 그들에겐 신선한 충격

한국체류기간도 매년 점점 늘어


한겨레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캔버라에 사는 줄리아나 거너(63)는 지난해 성탄절, 경기 시흥시 하중동을 찾았다. 한국의 수많은 관광지 대신 그는 수도권의 주택가를 여행지로 택했다. 유적지도, 대형 쇼핑몰도 없는 그저 평범한 도시의 ‘가정집’에서 그는 손자 오리엔(14), 친구 펄 차오(63)와 함께 열흘 동안 머물렀다. “사람이 너무 많은 건 싫다. 상품화된 관광지도 별로”라며 줄리아나는 조진영(45)씨네 아파트 방 한칸에 묵었다. 세 자녀를 기르며 작은 도시에 사는 한국인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궁금했던 것이다.

■ ‘강남 스타일’보단 시흥 삼미시장 줄리아나 일행이 보낸 열흘 동안의 한국 여행은 새로울 것이 없어 오히려 각별했다. 그들은 첫날 끼니로 동네 식당에서 파는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펄은 “한국의 건강한 채식 메뉴를 먹어보고 싶었다”며 좋아했다. 이튿날 찾은 동네 중국음식점에선 오리엔이 자장면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탕수육 소스에 밥까지 비벼 먹었다. 한국인에게 뻔한 동네 프랜차이즈 빵집도 이들에겐 ‘현지인과 수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줄리아나는 “빵집 주인이 영어로 우릴 반겨줬는데, 동네 주민과의 대화가 여행의 작은 즐거움이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거리 풍경도 이들에겐 한국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줄리아나는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내 또래 노인을 봤는데, 내가 사는 캔버라에도 이런 분들이 있다”며 “관광지의 상품화된 모습이 아닌 한국인들이 실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이들이 동네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버스를 타고 서울 강남 번화가에 구경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시흥 재래시장인 삼미시장보다 여행의 즐거움이 덜했다는 것이 줄리아나의 설명이다. “사람이 너무 많고 피곤했어요. 얼른 숙소로 돌아오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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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집 머물며 한국 드라마 보기 관광이 변하고 있다. 지금껏 관광이란 이름난 지역과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이른바 ‘맛집’을 찾아다니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쓰레기 버리기 등 관광객에 의한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전남 여수, 강원 속초, 서울 망원동 등이 대표적이다. ‘민폐관광’ ‘과잉관광’(오버투어리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더욱이 관광객이 쓴 돈은 실제 지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땅값과 임대료만 띄우는 결과로 이어져 세입자가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공간 고급화 또는 둥지 내몰림) 문제도 불거졌다.

그런데 최근엔 작은 동네에 머물며 직접 살아보는 방식의 여행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남아 한달 살기’ ‘제주 한달 살기’처럼 일정 기간 여행지에 살면서 새 환경을 충분히 경험해보는 형태의 관광이 나라 안팎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조진영씨는 이런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부터 공유숙박업(에어비앤비)을 시작한 그는 “외국인 관광객이 올 것이란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흥이란 도시는 오이도와 갯벌이 있긴 하지만 외국인들이 머물 매력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10개월 동안 조씨의 집엔 외국인 관광객 열네 팀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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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은 특별할 것 없는 도시에서 저마다의 여행을 즐겼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있어 아들과 한국 여행을 왔다는 인도네시아 중년 남성은 조씨네 거실에 가득 꽂힌 세 남매의 동화책들을 오랜 시간 들여다봤다. 한국 드라마 ‘덕후’라는 미국인 관광객 두명은 조씨 집에 머물며 태블릿 피시(PC)로 한국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를 본 뒤 드라마에 나온 한국 음식들을 사 먹고 돌아갔다. 이달엔 칠레에서 온 관광객 두명이 한달 동안 조씨네 집에 머물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서 공유숙박업을 하는 이지은(47)씨도 외국인들이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한국 문화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씨네 집 근처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등이 있지만 외국인들은 그런 곳보다는 한국의 소소한 문화를 경험해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집에서 닷새 동안 머문 30대 프랑스인 부부는 집 근처 찜질방에 다녀온 뒤 “사람들이 방바닥에 누워 자는 것은 왜 그런 것이냐. 프랑스엔 이런 것이 없다”며 한국의 구들문화를 신기해했다. 이씨는 “사람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땀을 흘리고, 구운 계란이나 식혜를 먹는 모습을 보며 외국인들이 즐거워하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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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일상이 그들에겐 관광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지난해 9월 서울시와 마포구청이 중국의 여행정보 공유 플랫폼 ‘마펑워’에 제안해 선정한 ‘서울에서 꼭 즐길 거리 10선’에는 닭한마리 메뉴 먹어보기, 포장마차 음식 먹어보기, 게임 등 이(e)스포츠 즐기기, 한국 드라마 전시관 방문, 조계사 템플스테이, 케이팝 댄스 배우기 등이 올랐다. 명동, 남대문시장, 고궁 방문 등과 같은 전통적인 관광이 아니었다. 황미정 서울관광재단 스마트관광팀장은 “한강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등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외국인들 눈에는 새롭게 비친다”며 “지역민이 즐기는 평범한 로컬 문화와 활동을 체험하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점점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외국인 관광객의 한국 체류 기간도 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외래 관광객 실태 조사’를 보면, 여름철이 포함된 3분기 기준으로 한국에 온 여행객 가운데 체류 기간이 31~60일인 비율은 2015년 평균 1.7%에서 지난해 2.6%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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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라밸 말고 ‘워레밸’의 등장 이런 현상은 전통적인 여행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봉구 동의대 교수(국제관광경영학)는 “여행의 본질은 짧은 시간 안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에게 새 문화를 배우고 관광객과 현지인이 서로 교감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국내외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삶의 균형(워라밸)을 넘어 ‘일-여가(레저)의 균형’(워레밸)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반영된 결과란 풀이도 있다. 이연택 한양대 교수(관광학부)는 “과거엔 일과 여가가 분리돼 여가는 그저 일한 다음 주어지는 보상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워라밸’을 넘어 일상 속에 일과 여가가 함께 녹아 있는 ‘워레밸’을 추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관광을 벗어나 낯선 지역과 그곳의 문화를 학습하는 ‘머무는 관광’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모바일 기술 혁신이나 공유숙박업의 등장도 이런 워레밸형 관광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해 말 한국관광공사가 최근 3년간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4만6천여건을 분석해 내놓은 ‘2019 관광 추세’를 보면, 올해 국내 여행의 흐름은 일상과 여행이 분리되지 않고 일상처럼 언제든 즐기는 여행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시흥/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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