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7 (금)

`전통맛집` 지킨다지만…안전 방치하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서울시가 을지면옥 등 노포(老鋪) 보존을 이유로 개발을 보류한 세운재정비지구 일대 좁은 골목 모습. 화재 발생 시 소방차 진입도 어려워 주민들 불안이 크다. [사진 = 이충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4일 낮 12시 35분 서울 중구 을지로4가 한 철물점 건물에서 불이 나면서 검은 연기가 2㎞ 이상 떨어진 남산에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솟구쳤다. 다행히 대낮이어서 건물 내부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신속히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지은 지 50~60년 된 낡은 건물들이 밀집한 지역이라 자칫하면 대형 화재로 번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달 을지면옥 등 노포(老鋪) 보존을 이유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정비사업 재검토를 선언하면서 청계천~을지로 일대 서울 도심부의 낡은 상가와 저층 주거 밀집지역의 안전에 비상등이 켜졌다.

세운지구는 매월 한 건꼴로 화재가 발생하는 데다 화재에 취약한 점포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히는 위험 지역이다. 토지주와 주민들은 "눈비가 올 때마다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날까봐 불안하다"며 "전통 맛집만 지키지 말고 주민들 안전도 지켜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7일 서울시와 중부소방서에 따르면 세운재정비지구가 포함된 중구 관할 주요 5개 법정동(입정동·산림동·인현동2가·인현동1가·충무로4가)의 최근 3년간 화재 발생 건수는 2016년 11건, 2017년 18건, 2018년 11건이다. 매월 한 건꼴로 화재가 나고 있는 셈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규환 의원이 2017년 10월 중소벤처기업부 등에서 받은 전국 전통시장 화재안전점검 보고서를 보면, 안전등급 D등급 이하 점포가 가장 많은 곳은 서울 세운상가로 405개에 달했다. 뒤를 이은 숭례문 수입상가(227개), 포항 중앙상가(146개) 등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다.

매일경제

14일 화재가 발생한 철물점도 세운지구 5-10구역에 포함된 곳이다. 경찰과 소방당국 조사 결과 아크릴 작업장에서 절단 작업 중 레이저 절단기에서 불똥이 튀며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확한 화재 원인은 2주 뒤 발표될 예정이다.

서울 도심인 데다 낡은 상가와 집들이 비좁게 모여 있어 화재 확산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중구소방서는 소방차 41대, 소방인력 133명을 긴급 투입했다. 다행히 이날 화재는 그나마 대로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한 시간 이내 거의 진화됐다. 만약 안쪽에 위치한 상가에서 비슷한 화재가 났다면 소방차 진입도 어려웠을 상황이다. 중구소방서 관계자는 "세운지구는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진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면서 "일부러 작은 소방펌프차 2.5t으로 들어가 화재를 진압하지만 불법주차가 잦은 곳이나 길이 좁은 골목은 펌프차도 길 끝까지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세운지구 상인과 주민들은 화재 발생 등 안전 위협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세운3구역 토지주 김 모씨(59)는 "지은 지 60년이 넘은 상가인데 1983년부터 정비구역으로 묶여 수리도 못하고 있다"면서 "비가 오면 물이 새서 감전·화재 위험에 시달리는데 길이 좁아 소방차 진입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같은 구역의 또 다른 토지주도 "그나마 지난 14일 화재는 대로변이었으나 작년 10월 세운3구역 안쪽에서 불이 났을 때는 소방차가 못 들어와 주민들이 소화기를 들고 나와 불을 끄기도 했다"면서 "결국 3채가 전소됐다"고 전했다.

낡고 비좁은 상가 건물에 대부분 화장실이 없어 대소변을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너무 낙후돼 찾는 손님은 줄어들고 재개발이 돼야 받을 수 있는 보상금을 기다리다 생활고 등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도 벌써 두 명이다. 안전은 물론 위생과 생활고까지 총체적 어려움에 놓인 셈이다. 세운 3-2구역 토지주인 홍 모씨(80)는 "화장실이 없어 지하철역까지 걸어가서 해결하는 상황이고, 급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길에다 소변을 보기도 해 악취가 심하다"면서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난달 16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갑작스럽게 "을지면옥 등 노포 보존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일주일 뒤인 23일 서울시는 세운지구 일대 정비사업을 연말까지 재검토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13년을 끌어온 세운 재개발이 또다시 발목이 묶인 것이다. 개발이 늦어지면서 세운지구와 을지로 일대 주민들의 안전 위험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을지로 인근의 한 주민은 "박 시장의 개발규제 때문에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는 여전히 1960~1970년대에 머물러 있고 화재 사고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면서 "박 시장이 삼양동 옥탑방에서 여름을 났다고 하던데 겨울엔 여기서도 한 달 살아봐야 현실을 직시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최재원 기자 / 신혜림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