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5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 이유로는 미국 남부 국경지역에 마약과 성폭력 문제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자신의 선거공약인 국경장벽 설치를 위해 사상 최장기 ‘셧다운’마저 불사했지만 충분한 예산 확보에 실패하자 ‘의회를 뛰어넘는’ 해결 방안으로 이 같은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웬만한 한국인들에게 ‘국가비상사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단어다. 1971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 선포했고 당시 국회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법적 뒷받침을 해주면서 이듬해 10월 유신 독재체제 수립으로 이어졌다. 국가비상사태는 1979년 10·26사태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비상계엄 확대 과정에서 다시 선포됐다. 이후 1981년 12월 국회에서 관련 법이 폐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미국에서는 전쟁이나 내란, 천재지변 등이 닥쳤을 때 행정부가 위기에 빠르게 대처하도록 1976년 국가비상법이 만들어졌다. 대통령이 ‘국가적 비상상황’이라고 선언(declaration of a national emergency)하면 의회 승인 없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후 40여 년간 대통령들이 58회에 걸쳐 국가비상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을 보면 권력 강화나 강압적 물리력 동원 수단으로 주로 이용됐던 한국이나 제3세계의 비상사태 선포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령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신종 플루가 유행하자 국가비상을 선언했다. 대부분 국제 분쟁이나 국민의 안전 및 건강과 직결되는 이슈였다.
▷미국 내에서는 멕시코와의 국경장벽 문제가 ‘비상사태’인가에 대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시민단체들과 야당은 대통령이 가공의 비상사태를 만들어 냈다며 무효화 절차를 검토하고 있다. 2020년 재선 가도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승부수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높다. 1971년 한국의 사례에서 그러했듯 비상사태는 위정자의 권력 강화에 악용되는 일이 적지 않다. 민주주의 선진국 미국에서 ‘트럼프식 비상사태’는 얼마나 먹힐 수 있을까.
서영아 논설위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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