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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이굴기의 꽃산 꽃글]바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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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설 연휴에 <다이너스티, 야생의 지배자들>을 보았다. 영국 BBC의 알아주는 다큐멘터리는 궁리출판에서 출간했던 적도 있어 더욱 텔레비전 앞으로 몸을 끌어당기게 했다. 침팬지, 황제펭귄, 사자, 아프리카 들개, 호랑이. 자연의 한 영역을 실효적으로 차지하는 이 지배자들을 좌지우지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나하고도 공통으로 엮이는 물이었다.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초원에 건기가 오면 순한 초식동물들은 물을 찾아 헤맨다. 이들을 먹이로 노리는 지배자들도 물 앞에서는 결국 꼼짝 못하는 신세였다.

요즘 뭍은 가뭄이 무척 심하다. 산에 가면 바짝 마른 숲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문명의 끄나풀인 등산화에 밟힐 때마다 마른 낙엽이 으깨지는 소리가 몹시도 자지러진다. 귀한 나무를 찾아 거문도에 가려고 나로도에 왔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가 뜨지를 못했다. 비와 배. 서로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오늘의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둘은 하늘을 매개로 서로 엮여 있지 않은가.

내일을 기약하고 나로도의 사양산에 올랐다. 눈썹에 걸리는 바다 건너 봉래산 기슭에 우주항공센터가 있다. 막연하게 하늘 너머를 상상하는 정도를 넘어 실제로 지구 바깥으로 나가려고 힘쓰는 곳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나중 사람들은 내가 거문도로 들어가듯, 화성이나 달로 가는 우주선에 가뿐히 몸을 실을지도 모를 일!

정상 근처의 바위에 이르렀다. 바위도 가뭄을 탄다. 바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파헤친 흔적이 역력한 곳에 바위손이 무성하다. 꽃을 피우지 않지만 숲 다양성의 일익을 담당하는 양치식물의 하나이다. 언젠가 EBS 다큐에서 본 바위손. 바짝 말라 죽은 척하던 잎이 비가 내리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 척박한 바위에서 겨울과 가뭄을 견디느라 줄기와 잎이 안쪽으로 돌돌 말린 바위손. 혹 멧돼지의 주둥이를 피하려 호랑이나 사자의 뭉툭하면서도 날카로운 발을 닮은 건 아닐까? 우수(雨水)가 임박했지만 아무런 기미가 없는 나로도의 무정한 하늘이었다. 바위손, 부처손과의 상록성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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