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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충무로에서] 아마존의 5조 vs SK하이닉스의 12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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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2017년 9월 미국 아마존이 제2본사 계획을 알렸다. 아마존의 약속은 50억달러(약 5조6000억원) 투자와 5만명 고용. 캐나다와 멕시코를 포함해 온갖 당근을 쏟아낸 238개 도시 중 승자는 뉴욕 롱아일랜드와 버지니아주 크리스털시티 두 곳이었다. 하지만 아마존은 롱아일랜드 일부 주민과 정치인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발하자 보란 듯이 철회했고, 이 틈을 노려 탈락 도시들이 물밑 접촉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린다.

1년 반 동안 아마존 본사 유치전은 각국 미디어의 화젯거리로 떠오르면서 전 세계인에게 보도됐다. 아마존은 유치 도시에 최대한의 금전적 인센티브를 받아냈고, 더불어 그 명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제2본사를 짓기도 전에 이미 투자액 이상의 효과를 얻어냈다고 본다.

지난해 12월 산업통상자원부의 두툼한 업무 보고 자료에 '대·중소 상생형 반도체 특화 클러스터 신규 조성(10년간 120조원 민간투자)'이라는 내용이 거두절미하고 한 줄 포함됐다. 금세 "SK하이닉스가 경기도 용인 인근에 새 용지를 찾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즈음 재계 인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아마존의 본사 유치전이 화두에 오르면서 "SK하이닉스가 아마존처럼 유치신청서를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대화가 오갔다. 반 농담조의 얘기였지만 모두의 결론은 하나로 모아졌다. "그랬다간 무슨 꼴을 당하려고…."

불과 두 달간 SK하이닉스 용지 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일은 한국의 비즈니스 환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마존보다 무려 20배 이상 많은 돈을 투자하는 당사자는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며 극도로 몸을 낮춘다. 사운(社運)이 달린 투자에 희망 지역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무슨 꼴을 당할까" 말을 아끼는 사이, 전국 각지의 도시가 "우리를 차별하지 말라"며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지자체가 기업 유치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기업을 설득하기 위한 '파격적인 당근' 마련에 골몰하기보다 정치권까지 동원하는 '압박'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균형 발전 프레임이 불거질 조짐을 보이는 것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첩첩산중 규제를 풀어야 하는 수도권이 선정되면 배가 산으로 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주력 생산라인이 있는 경기 이천시에는 특이한 역사관이 있다. 과거 D램 공장 하나를 증설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규제와 싸운 무려 7년의 세월을 기록한 곳이다.

당사자는 말이 없고, 정치권의 목소리는 날로 높아가는 120조원 투자 유치전에서 또 하나의 역사관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황형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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