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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시시비비] '가이드라인'이 보여주는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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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결국 여성가족부가 백기를 들었다. 지난 12일 각 방송사와 프로그램 제작사에 배포했던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가 논란을 빚자 일부 수정, 삭제하겠다고 19일 밝힌 것이다. 여론에 밀려 꼭 일주일 만에 '아니면 말고' 식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짚어볼 대목이 있다. 이미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비만을 막겠다며 '먹방' 규제 방침을 밝혔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던 사례가 있는 터다. 비슷한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이드라인'이 보여주는 '가이드', 즉 교훈을 새기는 것이 필요해서다.


여가부 '안내서'에서 비판의 과녁이 됐던 부분은 그 부록인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여기에는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외모 획일화의 사례로 '음악방송 출연 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란 소제목 아래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은 마른 몸매, 하얀 피부, 비슷한 헤어스타일,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과 비슷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실효성 없는 탁상행정" "군사독재 시대 두발, 스커트 단속과 뭐가 다르냐" "국민 외모까지 간섭하는 국가주의 망령"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여가부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한 것" "규제나 통제가 아니라 자율적으로 반영하면 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외모지상주의의 폐해가 문제긴 하다. 또 방송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가부가 이런 식으로 나서는 것은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선 방송 프로그램에 잘 생긴 이들이 주로 출연하는 것은 외모지상주의의 결과일지언정 그 원인은 아니다. 취업 면접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청년들이 있을 정도이라지만 이걸 방송이 부추긴 건 아니다.


여가부가 우려하는 내용도 문제다. '비슷한 외모'의 기준은 무엇일까. 눈 크기, 코 높이 등이 같은 건가? 물론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아이돌 그룹을 두고 '같은 병원 출신들인가'라는 농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과도한 비율'이라니 그건 어느 정도인가? 절반 이하? 3분의 1 이하? 아이돌 그룹은 이 정도로만 출연시키라는 건가?


더 근본적 문제는 외모지상주의와 성평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개인의 취향에 대한 것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의문들이다. 이를 의식한 듯 여가부는 "방송을 규제할 의도도 권한도 없다"면서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이라 했다. 하지만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보면 언론과 관련한 '가이드라인'을 "언론 보도에 대한 정부의 보도 지침"이라 풀어놓았다. 강제성 유무를 떠나 군사독재 시절 홍보조정실의 '보도 지침'이 떠오르는 시대착오적 행태 아닌가.


방송 그리고 국민을 가르칠 대상으로 보지 않고서야 이런 '안내' '가이드라인'을 낼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정부가 나서야 하고 나설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일의 성격뿐 아니라 효율성을 따져 봐도 말이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은 언론의 자유에 관한 고전으로 꼽히는 '아레오파지티카'를 썼다. '현대언론사상사(로버트 알철 지음ㆍ나남출판)'에는 "모든 주의와 주장을 이 땅 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면 진리도 거기에 있을 터인데…진리와 거짓이 서로 다투게 하라. 어느 누구가 자유롭고 개방된 대결에서 진리가 패배하리라 본단 말인가"라는 밀턴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마찬가지다. 외모지상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정부가 '한 건 하기' 식으로 나설 게 아니라 시장과 상식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설사 나서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그러니 이번 소동을 보면 오히려 정부 역할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더욱 시급해 보인다. 지나친가.


김성희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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