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톨릭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학의 모태인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펼친 만세운동을 재조명하는 기념 학술행사와 음악회를 잇달아 개최한다. 사진은 성유스티노신학교 1923년 입학식 사진과 신학교 건물, 태극기를 합성한 이미지.(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대구=국제뉴스) 백운용 기자 =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교내 운동장에서 대구경북 최초의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을 하였다."
대구가톨릭대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학의 모태인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5일 펼친 만세운동을 재조명하는 기념 학술행사와 음악회를 잇달아 개최한다.
대구가톨릭대는 오는 3월 5일 오후 3시 대구 유스티노캠퍼스 대강당에서 '31운동과 대구대교구'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고, 일제 치하에서 천주교 대구대교구가 지역사회와 교회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재조명한다.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 7일 일기(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 7일 일기(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영남교회사연구소(소장 김태형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와 한국가톨릭신학학회가 주관하며, 이경규 전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국채보상운동의 성격과 31운동', 김정숙 영남대 교수가 '대구 평신도들의 항일 운동', 김태형 교수가 '성유스티노신학교의 31운동'을 주제로 각각 발표한다.
이에 앞서 오후 2시 유스티노캠퍼스 내 성유스티노성당에서 '35만세운동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 대구가톨릭대 김정우 총장의 인사말과 천주교 대구대교구 조환길 대주교의 격려사에 이어 신학생들의 기미독립선언문 낭독, 태극기 현양 퍼포먼스, 음악대학 교수와 학생들의 합창과 앙상블 연주 등으로 진행된다.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의 '35만세운동' 사실은 드망즈 주교가 쓴 일기에 자세히 남아 있다.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지냈다.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 7일 일기 불어 일기 원본 파일.(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 7일 일기 불어 일기 원본 파일.(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 7일 일기에 '한국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 (중략) 대구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흥분되어 있다. 그들은 그저께(3월 5일) 저녁에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 화들이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를 잃는 학생들이 나올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신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보였다. '영남교회사연구월보' 제16호(1993년 2월 20일)에 실린 윤광선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따르면, 만세운동을 준비한 구체적 인물과 역할까지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내용은 천주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 2013년 펴낸 '성유스티노신학교(1914~1945)'에도 나와 있다.
천주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 2013년 펴낸 '성유스티노신학교(1914~1945)'에 는 만세운동을 준비한 신학생과 역할 등이 실려 있다.(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천주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 2013년 펴낸 '성유스티노신학교(1914~1945)'에 는 만세운동을 준비한 신학생과 역할 등이 실려 있다.(사진제공=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은 윌슨(Wilson)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낼 것과 3월 9일 오후 2시에 약전골목에서 있을 대구의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신학생들 중에서는 삭발례 받은 김구정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었고 신학교의 평신도 교사이던 홍순일이 사회단체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중략) 김구정 신학생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는 태극기를 만들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신부에게 알려져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제작된 유인물과 태극기는 모두 교장실로 압수되어 버렸다.'
'성유스티노신학교(1914~1945)'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까닭을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고 있던 한국 교회는 일제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 정교분리의 원칙에 동조하였는데, 이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은 민족운동인 31운동을 정치 문제로 해석했고, 신자들에게 정치 문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으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서술돼 있다.
김정우 대구가톨릭대 총장은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의 '35만세운동'에 큰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 만세운동은 대구경북 최초의 일제 항거 만세운동이었고,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개신교 학교 학생들 주축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며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그 날의 외침을 우리 지역민과 학생들이 꼭 되새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가톨릭대는 지난 2017년 1월 김 총장 취임 후 대구가톨릭대 대표홈페이지 '학교 역사' 부분에 이 같은 내용을 게시해 학생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있으며, 매년 3월 5일 교내 전광판에 '35만세운동' 사실을 게시해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저작권자 Copyright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