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여러 차레 요하를 넘어 요서 지역에 군대를 보냈다. 광개토왕 때 후연과 주도권을 다투면서, 후연의 숙군성(宿軍城)과 연군(燕郡)을 공격하였다. 장수왕 때에는 북연의 풍홍을 구원하기 위해 화룡성(和龍城·현재의 조양)에까지 군대를 보내 북위군과 일촉즉발 충돌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화룡성에 입성했던 고구려군이 그곳을 점령하지 않고 되돌아왔음에서 5세기 전반까지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요서 지역 진출이 일시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요서 지역으로 세력 확대를 자제하고 있었던 데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북위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위의 세력이 요하 일대까지 미쳤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북위의 세력 범위는 화룡성(지금의 요령성 유성)을 거점으로하여 의무려산과 대릉하(大凌河) 하류를 잇는 범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릉하에서 요하 일대까지는 고구려나 북위의 영역이 아닌 중간 점이 지대였고, 이 지역에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서 북쪽, 즉 요하의 서북쪽 시란무렌강 유역 쪽으로는 고구려가 꾸준히 세력 침투를 꾀하고 있었다. 일찍이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거란[비려]에 대한 정벌을 나선 바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5세기 후반에 들어서 고구려는 동북아 국제정세를 이끌어가는 중심 국가로서 안정된 위상을 확보한 뒤, 서북방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시라무렌 일대 거란(契丹)족은 일부는 북위에 투항하여 이주해 갔고 일부 집단은 고구려에 부용세력화되었다. 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거란 북방의 지두우(地豆于)를 유목 제국인 유연(柔然)과 함께 분할 점령을 기도하는 등 시라무렌강 북방으로도 지배력을 확대해 갔다.
시라무렌강 : 시라무렌강은 5세기 이래 고구려 요서 진출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사진=바이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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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523년부터 북위에서 내란이 확산되어 갔는데, 요서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북위 조정은 이 반란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틈타 525~528년경에 고구려는 요서 진출을 단행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적어도 영주(營州) 일대까지 밀고 들어갔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대릉하 동쪽 범위로 세력 확장을 자제했다. 당시의 군사 행동이 북위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한 전격적인 작전이었지만, 향후 북위는 물론 동북아 여러 종족의 동향까지 염두에 둔 대응이었다고 보인다.
한편 북위는 내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붕괴하였고, 그 뒤를 이은 동위(東魏)도 요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자 거란족이 시라무렌강 유역 본거지에서 남하하여 영주 가까이까지 내려왔다. 동위를 이어 북제(北齊)가 등장하면서 거란족에 대한 통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553년 북제 문선제(文宣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거란 정벌에 나섰다.
용의주도한 공격으로 문선제가 이끄는 북제군은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제군의 작전 범위는 어디까지나 대릉하 서안, 즉 요서 서부지역에 국한하여 전개되었다. 대릉하 하류의 동쪽 지역, 즉 요서 동부지역으로의 군사 행동은 자제한 인상이다. 아마도 대릉하 동안 지역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서 지역은 대릉하 하류와 남북으로 뻗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는 자연 경계로 동서로 구분되고 있다. 과거 한(漢)이 이 지역과 요하 이동을 묶어 요동군으로 편성했던 연유도 이러한 자연 조건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요서 동부지역을 차지한 것은 단지 수백리 영토를 얻었다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요동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전략적 지역을 확보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요서 지역을 통해 거란은 물론이고 북방 유목 세력과 교섭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요서 지역은 농경과 유목이 연결되는 전이(轉移) 지대에 속한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북위 30~40도에 걸쳐서 농경과 유목이 공존한 농목 전이지대가 거대한 벨트를 이루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실크로드로부터 중앙아시아의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거쳐 내몽골의 오르도스, 북중국의 산서지역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요서지역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농목 전이지대는 농경사회와 유목사회가 만나는 곳으로 농목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요서 지역의 여러 종족들은 대부분 유목이나 수렵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들 유목, 수렵사회는 자급자족이 어려워 어떠한 형태로든 농경사회와 지속적으로 교역하면서 물자를 획득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요서 지역의 유목, 수렵 종족들 사이에서는 농경사회인 고구려가 부족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주요 교역국인 셈이다.
반대로 요서 지역의 여러 종족들은 많은 수의 말과 소를 보유하고 있고, 다수의 기병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요서 지역이 우마의 공급처로서 혹은 지원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곳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와 수, 당 전쟁 때에 요서 지역 종족들은 저마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고구려 혹은 수, 당의 편에 서서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요서지역 종족들에 대한 복속이나 세력권으로 편입은 고구려의 대외전략과 군사적 안정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렇게 농목 전이지대의 동쪽 끝인 요서지역은 4세기 이후에 실크로드 및 오아시스 경로가 요서 지역까지 연장되면서, 농목 교역의 중심지로서 그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런 요서 지역에 눈길을 거두지 않고, 결국 북위 말의 정세를 이용하여 요서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농목교역의 이권을 차지하는 한편 유목세력과 긴밀하게 교섭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점점 증대되어 가는 요서지역의 정치, 경제적 가치는 고구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인 중원 세력이나 돌궐 세력 모두가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6세기 중반 이후 요서지역이 동아시아의 세력 각축의 화약고가 되어갔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배경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순히 영토 확장이 아니다. 북위의 내부 정세나, 점점 커지는 요서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새로이 변화되는 국제질서 운영의 전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정세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5세기 이래 농축되어 왔던 세계질서 및 전망을 읽는 능력이 다시 한번 발휘된 것이다. 동북아시아 패자의 자리가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고구려인의 넓은 시야와 결단력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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