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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예술가' 자처하는 연쇄살인마...칸영화제 뒤흔든 논란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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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 감독 신작

영화 '살인마 잭의 집'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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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논란을 부른 영화 '살인마 잭의 집'.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를 본뜬 지옥도 장면이다. 붉은 두건을 쓴 왼쪽 사내가 주인공 잭(맷 딜런), 그 오른쪽은 잭을 찾아온 의문의 사내 버지(브루노 간츠)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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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인이 예술이라 믿는 사내가 있다. 12년간 60명 넘게 죽인 그의 이름 잭(맷 딜런). 자칭 ‘교양 살인마’인 그는 급기야 냉동시켜둔 희생양들의 시체로 거대한 집을 짓는 새로운 예술에 도전한다. 이는 21일 개봉한 공포 스릴러 ‘살인마 잭의 집’ 한 장면이다. 덴마크 거장 라스 폰 트리에(63) 감독의 문제적 신작이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상영 도중 100명 넘는 관객이 극장을 뛰쳐나간 바로 그 영화다.

살인이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예술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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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잭은 자신이 살해한 시체들로 집을 지으려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집은 덴마크 유명 건축가 비야케 잉겔스가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협업해 만들었다. 사진은 잭이 건축물 모형을 들여다보는 모습.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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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6년 전 4시간이 넘는 대작 ‘님포매니악’에선 예술과 외설의 경계, 그 이전 ‘안티크라이스트’(2009)론 종교적 금기를 넘나드는 등 한계에 도전해왔지만, 이번 영화가 부른 논란은 그 모든 전작을 뛰어넘는다. 잭의 회상 형태로 드러나는 다섯 가지 살인의 묘사 때문이다. 영화 초반 우마 서먼이 연기한 희생양의 머리가 훼손되는 장면부터 아찔하다. 어린아이 시체를 꼭두각시 인형처럼 다루고, 여성의 사체 일부를 엉뚱한 용도로 사용하는 잭의 태도는 역대 어떤 사이코패스보다 뻔뻔하고 무자비하다. 살인현장과 시체들을 완벽하게 연출하려 드는 그의 모습은 영화감독처럼도 보인다.

그런 잭을 비웃게 하는 블랙코미디 코드도 공존한다. 가령 극 중 잭이 “옛 성당엔 신만이 볼 수 있는 예술품들이 숨겨져 있고 그 뒤엔 위대한 건축가가 있다. 살인도 마찬가지”라 읊조리며 자신의 살육을 노트르담 대성당, 피카소와 고갱의 그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 등 위대한 예술에 빗대는 장면은 대놓고 거창해서 실소가 터진다.

타인 상처 주는 이기적 예술…종착지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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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 영화로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주연배우 맷 딜런과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사진 엣나인필름, Darren Br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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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런 예술작품들을 나열한 대목에서 역시 지지와 비판이 거세게 엇갈렸던 전작 ‘멜랑콜리아’(2011) ‘님포매니악’ 등의 장면도 끼워 넣었다. 자신의 영화도 걸작 반열이란 걸까.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만난 그는 “다른 영화 장면을 넣기엔 저작권료가 감당 안 됐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예술은 때로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이기적 행위란 점에서 살인과 닮았다. 영화를 둘러싼 논란은 예상했지만, 표현의 한계를 넘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 영화의 출발점이다. 그간 금기에 도전하며 때로 도가 지나쳤다고 지탄받기도 했던 감독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것.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고 든 장면이 외젠 들라크루아의 회화 ‘단테의 조각배’를 본뜬 지옥도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컴퓨터그래픽 없이 빚어낸 이 그림 같은 장면에서 잭은 한 치 앞의 운명을 모르는 채 비장하게 서 있다.

맷 딜런의 연기도 절묘하다. 그는 “잭이 단순한 연쇄살인마가 아니라, 공감대가 부족했던 좌절한 아티스트라 생각했다”면서 “이 영화만큼이나 말 그대로 ‘지옥’까지 가본 작품은 이제껏 없었다.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였다”고 했다. 잭의 살인 회고를 들어주는 의문의 남자 ‘버지’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베를린 천사의 시’(1987)의 명배우 브루노 간츠가 열연했다. 한국 배우 유지태도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짧게 등장한다.

"무의미한 폭력 전시" vs "거장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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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중 한 명으로 출연한 배우 우마 서먼. '님포매니악'에 이어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다시 뭉쳤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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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평가는 0점부터 100점 만점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도덕성과 논리를 뛰어넘어 예술에 매료된 개인의 어리석음까지 폭넓게 담아냈다”(슬랜트매거진)는 호평과 “명백히 볼만한 영화지만, 이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상해의 전시가 완전히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놀랍다”(할리우드리포터)는 비판이 엇갈린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는 영화비평지 ‘필로’에서 “맷 딜런은 거의 ‘괴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중략) 이 영화는 심리적 가위로 당신의 심정을 닥치는 대로 찢어나갈 것”이라며 라스 폰 트리에의 귀환을 반겼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인간의 상상 속 악의 정수, 악의 판타지를 끝까지 밀어붙여 예술적으로 포장한 영화”라 했다.

"삶 자체가 악…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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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은 빨간 모자를 쓴 채 같은 모자를 쓴 희생양들을 공격한다. [사진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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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온 감독이 갑자기 “사악한 남성에 관한 영화”를 만든 이유는 뭘까. 지난해 그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살인마 잭의 집’은 삶 자체가 악이고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상에서 비롯된 영화”라며 “이런 사실은 슬프게도 최근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입증됐다”고 했다. 극 중 잭은 어린 소년들을 사냥하는 가장 끔찍한 장면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나오는데, 이는 트럼프 지지를 상징하는 빨간 모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난해 말 미국 정식 개봉 버전에선 공교롭게도 이 에피소드의 1분 남짓한 장면이 지나친 폭력성을 이유로 삭제됐다. 한국에선 무삭제 버전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개봉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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