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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아일랜드 '낙태죄 폐지' 결실, 시민운동·여론의 힘으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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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 조사관 방한…"가톨릭 신자 다수가 폐지 찬성"

뉴스1

21일 오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의 주최로 서울 종로구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포럼에서 참석자들이 "낙태죄는 위헌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2.21/뉴스1 © 뉴스1 윤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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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윤다정 기자 = 인구의 88%가 신자인 '가톨릭국가' 아일랜드에서는 최근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 문제와 관련해 특기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지난해 5월 낙태금지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8조의 폐지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국 해당 조항의 폐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폐지를 찬성한 유권자 비율이 무려 66.4%에 이르렀다.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 처벌조항의 위헌 여부를 4월 중 선고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아일랜드의 여성 당사자이자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의 낙태캠페인·조사담당관인 그레이스 윌렌츠가 21일 한국을 찾았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낙태처벌 관련 문제를 10년 이상 다루며 활동해 왔다.

이날 오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의 주최로 서울 종로구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시민사회, 낙태죄 위헌을 논하다' 포럼에 참석한 윌렌츠 담당관은 아일랜드 사회가 낙태죄 폐지 의제에서 진일보를 이룰 수 있던 배경에 대해 "부모와 가톨릭교회, 변호사, 노동조합 등 사회의 다양한 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여성의 경험 공유가 큰 힘 발휘…대안적 법안도 제시"

윌렌츠 담당관은 "35년 동안 10번의 정권교체가 있었고 대대적인 대중 캠페인이 있었으므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었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직접 나서 낙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까지 전국적인 토론에 참여하면서 여론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일랜드 시민사회는 또한 여성이 자신의 몸과 건강, 삶에 관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메시지에 중점을 두고 캠페인을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성의 '선택권'과 '건강권'을 이유로 낙태금지 조항의 폐지를 찬성한 유권자들이 가장 많았으며, 43% 가량은 언론과 지인을 통해 접한 실제 낙태 경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윌렌츠 담당관의 설명이다.

그는 또한 "낙태를 비범죄로하면서도 다른 규제가 있을 수 있는 입장을 포함했기 때문에 찬성률이 높아질 수 있었다"며 "헌법에서 (낙태금지) 조항을 폐지했을 때의 법적 공백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모델이 될 수 있는 법안을 제시했고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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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국민투표 결과 '낙태금지법 폐기'가 최종 결정되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낙태 허용을 주장하는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AFP=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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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국민들이 자신의 교리적 신념과 낙태죄 폐지 의제를 분리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윌렌츠 담당관은 "국제앰네스티가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일랜드의 가톨릭신자 대다수가 낙태금지 조항 폐지에 찬성했다"며 "개인적·도덕적으로 낙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입장을 타인에게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인권과 관련된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만능 해답'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윌렌츠 담당관은 "아일랜드는 헌법 개정을 위해 국민투표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며 "국민투표라는 것을 변화의 수단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인권은 결코 투표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낙태금지·처벌이 불법시술 양산…접근권 확대해야"

헌법재판소 선고를 앞둔 한국 사회에 아일랜드가 거둔 성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권 이후 낙태 시술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수술을 담당한 의사가 실형을 선고받는 등 사실상의 '처벌수단'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과거 아일랜드의 상황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임신중단 시술을 한 여성과 의료인이 최대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북아일랜드에서 21세 여성이 인터넷으로 구한 약물을 이용해 스스로 임신중단을 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있다.

윌렌츠 담당관은 "설령 기소되지 않더라도 낙태의 범죄화로 인해 낙태 이후 치료를 받기는 더 어려워졌다"며 "여성들은 합병증을 경험할 때도 낙태했다는 이유로 기소당할까봐 두려운 나머지 (의료적인) 도움을 받기를 주저했다"고 설명했다.

임신중단이 필요한 아일랜드 여성들은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외국으로 위험한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윌렌츠 담당관은 이처럼 낙태의 금지와 처벌이 오히려 불법시술을 양산하고 비용을 늘리며 여성의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만큼, 국제기준에 따라 임신중단 시술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수차례 역설했다.

그는 "많은 국제인권기준이 여성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임신중단 시술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고 있다"며 "UN의 여러 조약기구에서는 임신 후기에도 여성의 건강과 생명이 위험에 처할 경우,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한 경우, 태아의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경우 등 최소한의 경우에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mau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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