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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기고] 좋은 일자리와 많은 일자리는 양립할 수 없나 / 이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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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호창
노사발전재단 일터혁신본부장


더 좋은 일자리와 더 많은 일자리는 양립할 수 없는가? 고용과 관련된 논의와 정책의 커다란 쟁점 중 하나는 일자리의 양과 질의 문제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양립 불가론자들은 결국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일자리 질의 저하나 낮은 질의 일자리 증가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양립 불가론은 고용 문제에 압박을 느끼는 정책당국자에게는 ‘꿀이 묻은 독배’와 같다. 어떻게든 고용을 늘려야 하는 상황의 압박 속에서 일자리가 늘어날 수만 있다면 일자리의 질이 대수인가. 하지만 좋은 일자리와 많은 일자리는 양립 가능하며, 오히려 좋은 일자리를 통해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일자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최근의 연구 성과를 집약하면, 좋은 일자리란 고용안정과 적정보수라는 일반적 조건 외에 직무자율성과 학습기회가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 직원들이 직무와 관련해 책임과 자율성을 갖고 일할 수 있을 때, 직무수행에서 더 많은 학습과 능력 개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직원들이 직장의 혁신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을 때, 그것이 좋은 일자리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일자리와 혁신경제, 고용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국가혁신체계의 저명한 연구자인 룬드발 교수의 논의가 시사적이다. 그는 유럽근로조건조사(EWCS) 자료를 활용한 분석에서 직무자율성과 학습기회가 높은 일자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훨씬 높으며, 이러한 일자리가 혁신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됨을 확인하였다. 더 나아가 고용에 대한 종단 분석을 통해 많은 유럽국가에서 일자리의 질과 고용률 증가 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때 고용률도 함께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학습기회, 직무자율성, 참여기회가 높은 일자리는 직원의 역량과 동기를 제고시키고, 그것이 조직의 혁신역량과 활동을 강화해 조직 성장과 고용 증대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종종 좋은 일자리를 조직 성장의 결과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생산성이 향상되고 조직이 성장할 때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면적인 주장이다. 좋은 일자리는 조직 성장의 결과일 수 있지만, 동시에 조직 성장의 조건이자 원동력이다. 일자리의 질적 개선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만들 때 혁신과 성장이 가능하다. 유럽연합(EU)은 2015~18년에 일자리의 질, 혁신, 고용성과 간의 관계를 연구·조사하는 QuInnE 프로젝트를 운영·지원했는데, 그 대부분의 분석결과는 좋은 일자리가 혁신과 고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성장동력의 악화와 노동배제적 혁신 속에서 고용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일자리의 질 또한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일터혁신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데, 특히 일자리의 질과 관련된 작업조직 부문은 최하위권(OECD 2016)이다. 노사발전재단 일터혁신지수 조사에서도 작업조직 영역은 100점 만점에 36.4점(2016년)으로 낮게 나타났고, 최근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이제는 노사정이 함께 힘을 합쳐 우리의 일터를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일터혁신을 통해 근무환경을 개선해 학습과 숙련, 참여와 자율이 어우러지는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좋은 일자리는 근로생활의 질을 개선할 뿐 아니라 혁신과 성장을 이끌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좋은 일자리와 많은 일자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추구되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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