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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시민편집인 칼럼] 말과 권력 / 신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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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권력관계가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호칭에 담긴 그리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권력관계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변화가 일어나면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가족 내 성별 호칭이다.

한겨레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음력설을 즈음하여 전통적인 호칭을 둘러싼 남녀 갈등이 뉴스가 되었다. 남편 가족은 높이고, 아내 가족은 낮추는 전통적인 호칭들이 성차별적인 호칭으로 거론되면서, 설 명절 호칭이 쟁점이 된 것이다.

호칭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고 또 확인하는 말이다. 가족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호칭은 가족 관계에서의 역할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위계서열 더 나아가 권력관계를 담고 있다.

존댓말과 하대말만이 상하 관계와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계적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호칭은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 모두가 그 위계를 확인하고, 자신과 상대의 위치에 걸맞은 생각과 사회적 역할을 하도록 서로 기대된다.

세상은 말로 이루어졌다. 말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세상을 알아가게 되고 세상의 질서를 배우게 된다. 어린아이들이 사용하는 어휘 수에 비례하여 그만큼 세상을 많이 알게 된다.

말은 반복을 통해서 습득한다.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하기까지 혼자서 수천번의 옹알이를 한 뒤에 엄마가 들을 수 있는 물리적인 소리인 ‘엄마’라는 소리를 낸다. 생존을 위해서 가장 먼저 엄마라는 말을 하지만, 점차 엄마에 담긴 사회적, 문화적, 감성적 의미를 배워간다.

말은 언제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집합물이다. 수십만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대를 이어서 사용하여 말이 만들어졌다. 오랫동안 사용된 말은 더 이상 그 의미와 진실에 대해 의심을 받지 않는다. 말 자체가 자명하게 받아들여져서 ‘말 스스로가 말을 하게 된다’.

미셸 푸코가 간파한 것처럼 말은 권력이다. 말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는 순간, 그 말에 숨겨진 권력과 위계 관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말하는 주체가 보이지 않음에도 그 말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여 특정한 방식으로 판단하게 하고 또 행동하게 한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더라도 말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한다.

호칭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호칭이 단순히 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생산하고 또 유지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호칭 문제는 이미 17년 전 2002년 한일월드컵 축구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한국인에게 자연스럽게 인식되었던 호칭이 히딩크 감독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선후배 사이의 호칭으로 인하여 시합 중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선수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후배 간의 위계서열을 파괴하기 위하여 ‘호칭 파괴’를 시도하였다. 서로 이름을 부르도록 한 것이다.

집단적인 움직임이 중요한 축구에서 선수들 간의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위계적인 호칭을 평등한 호칭으로 바꿨다. 선후배가 아니라 자신의 포지션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는 선수가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호칭 파괴는 호칭이 위계적인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최근 호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권력관계가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호칭에 담긴 그리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권력관계가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변화가 일어나면서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가족 내 성별 호칭이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 관계가 크게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생아가 줄면서 한 자녀 가정이 급격히 늘어났다. 딸만 있는 가정도 3분의 1 정도에 이르고 있다. 또한 남아보다 여아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남아선호사상도 사라졌다. 남성 중심 제사 문화도 자연스럽게 바뀌고 있다. 여성들의 고학력화로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사회 전 영역으로 진출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제도와 문화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회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말의 권력이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대신 새로운 말이 점차 호응을 얻고 있다. 사실 젠더, 일·가족 양립, (양)성평등과 같은 말이 그다지 오래된 말은 아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투와 같은 사회운동과 더불어 ‘말의 변화’가 보다 근원적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다가오는 봄,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만들어내는 ‘말’이 한겨레를 가득 채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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